<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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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내가 써니와 알게 된 이후의 두 주일동안,나는 한 열 번쯤 써니와 만났습니다.서너 번은 단둘이 만났고,나머지는 두 쌍이나세 쌍이 같이 어울려서 놀고는 했습니다.써니와 나는 어쩌다가 보니까 특별히 상원이-양아 팀과 자주 더블 데이 트를 하게 됐는데,그건 아마도 써니와 양아가 유독 잘 어울려 다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써니와 내가 단둘이 만날 때에는,우리는 주로 홍대입구의 써니가 아는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같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써니가 담배피우는 모습은 보통 여고생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아편쟁이처럼 궁상맞게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 라 아주 우아하고 폼나게 담배를 피웠다는 거지요.언젠가 한번은 써니가 말하기를,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맛보는 것도 중요하지만,담뱃갑에서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하는 과정을 즐길줄 알아야 진짜 담배를 아는 것라고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써니는 나보다 몇배나 더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나는 혼자 속으로 놀라고는 했습니다.한번은 내가 생맥주에 취해서 써니에게 그런 생각을 털어놨는데,거기에 대한 써니의 대꾸야말로 나를 팍 기죽이 는 거였습니다.인생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는 더 불행하기 일쑤인 거야.
우리학교에서는 문제아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나지만,써니 앞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순진하고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모범생처럼 되는 거였습니다.어떤 때 써니가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짓는 눈빛은,마치 어떤 흑백영화에서 본,키스만으 로도 임신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어쩐지를 확인하려고 병원에 온 소녀를 쳐다보며 웃는 산부인과 의사의 눈빛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거였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첫 두주일 동안에 써니에게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써니에게 선택당한 어떤 남자라도 예외일 수가 없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그애는 언제고 멋있었고, 아무리 파고들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신비와 넉넉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원이-양아 팀과 더블데이트를 할 때에는 볼링장에가거나 여의도광장에 가서 자전거를 타거나,아니면 노래방에 가서악을 쓰면서 노래를 부르고는 했습니다.써니는「달의 몰락」이나「그냥 걸었어」또는 「혼자만의 사랑」같은 노래를 좋 아해서 내게불러달라고 했는데,내가 그 노래들을 부르면 아무리 점수가 안나와도 가수가 부른 것보다 더 듣기 좋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양아도 괜찮은 애였습니다.악동들은 그애가 너무 크고 뚱뚱해서 우량아의 뒷 두글자를 따고,또 여자애치고는 다혈질에 건들거린다고 해서 양아치의 첫 두 글자를 따서 별명을 만든 거였지만,오히려「양아」라는 호칭이 예쁘고 상큼 한 면에서 그애에게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침내,우리 네쌍이 천마산으로 캠핑을 떠난 건(아시겠지만)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습니다.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탈 때부터 비오기 전에 이는 한차례의 음산한 돌바람이 역 광장을 휩쓸고 다니더니, 마석역에 내리는데 잿빛 하늘이 비를 뿌리 고 있었습니다.그때는 벌써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즈음이었습니다.캠핑갈 때 우산을 챙겨 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역에서부터 우리는 무방비상태로 비를 맞았고,비를 맞다보니까 예상 외로 추웠고,그러는데 「여관」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띈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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