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영의 DVD 세상]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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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감독 : 루키노 비스콘티

주연 : 더크 보가드. 비요른 안데르센,

제작사 : 워너 브라더스

가격 : 19,800원

작품성 ★★★★

화질 ★★★☆

음질 ★★★

(★ 5개 만점)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 버린 곳,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과 지나간 역사의 스산한 흔적이 동시에 묻어나는 도시 베니스. 삶에 지친 예술가가 생의 마지막을 맞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이 있을까. 더욱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할 아름다운 사람까지 있다면 말이다.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제목 그대로 베니스의 끝 리도섬에서 죽음처럼 다가온 치명적인 사랑에 잠식당한 예술가의 마지막 순간과 고뇌를 다룬 작품이다.

영혼을 뒤흔드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이 낮게 깔리는 가운데,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증기선의 스산한 풍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퇴폐적인 정서와 탐미적인 영상으로 오랫동안 영화광 사이에서 회자돼 왔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한때 비디오로도 좀처럼 구하기 힘든 희귀 영화였던 이 작품을 마침내 깨끗한 화질과 사운드로 단장한 DVD로 만나게 됐다.

저명한 음악가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베니스의 유명한 휴양지, 리도섬에 도착한다. 어느새 음악적 영감도, 삶의 희망도 모두 잃은 채 늙고 지친 그는 호화로운 호텔에서 천사 같은 미소년 타지오를 만나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죄의식과 끊을 수 없는 열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구스타프는 감히 다가서지도 못한 채 천상의 소년 타지오의 주변을 빙빙 맴돈다. 망원렌즈에 의해 서서히 화면 밖에서 안으로 포착되는 타지오의 모습과 그를 따라 미로처럼 얽힌 베니스의 뒷골목을 집요하게 쫓는 구스타프.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끝에 다다른 그는 천상의 소년 타지오에게서 잃어버린 예술적 영감과 세상의 마지막 순수를 보았던 것일까?

이렇듯 영화는 안타까운 사랑의 기운이 화면 가득 번지는 가운데 베니스 전역에 퍼진 전염병에의 공포가 더해지면서 비극적인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밀라노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인 비스콘티 감독은 전후 이탈리아의 피폐한 현실을 냉엄하게 다룬 네오 리얼리즘의 선두감독이었지만 이후 점점 자신의 본령인 귀족적이며 우아한 미적 세계를 담는데 몰두했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특히 평생 토마스 만에 몰두했던 그는 만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도 고독과 죽음에 대한 탐구라는 만의 세계를 아름다운 영상 속에 구현하고자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던 감독의 귀족적인 풍모와 감각은 DVD의 서플먼트(부가영상)로 수록된 '비스콘티의 베니스'라는 짧은 영상물에서도 확연히 감지된다. 또한, 2.35대 1의 와이드 화면 가득 담긴, 수 백년 세월을 간직한 베니스의 풍광과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위에 선 구스타프의 안타까운 눈빛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긴 여운으로 남아 관객들을 서서히 영화 속 세계로 이끌고 간다. 영화 속 구스타프가 그랬듯 우리 역시 치명적이며 퇴폐적인 영화의 아름다움에 서서히 잠식당하게 되는 것이다.

모은영씨는 중앙대 영화이론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EBS '시네마 천국'의 작가 및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 요 대사

"다른 이를 향해 웃지도 마, 쳐다보지도 마. 오직 나만을 바라봐. 사랑해 타지오!" 어둠에 감싸인 밤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아센바흐. 하지만 그저 대상 없는 공허한 고백일 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천사 같은 타지오의 모습을 응시하는 아센바흐.

*** 조 장면

젊음을 되찾고자 머리를 염색하고 창백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던 아센바흐. 전염병의 기운이 온 베니스를 감싸던 어느 날, 모두가 떠난 해변에 홀로 앉아 검은 염색약을 피처럼 흘리며 서서히 쓰러져 가던 그의 모습. 관능과 아름다움과 죽음이 혼재한 비극적인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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