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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이곳만은 제발 가지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이 생이 남달리 짧았던 것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만나 마음에 담았던 시간 그 기억이 제게 있는데 억울하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허나 뼈아픈 후회는 남습니다. 그대를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거. 세상이 친 덫을 내손으로 거둬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드라마 <황진이>의 대사 중 한 대목이다. 은호 도령은 황진이와의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폐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상여가 황진이의 교방 앞에서 움직이질 않자 황진이가 저고리를 벗어 상여를 덮어주었고 마침내 상여가 움직였다는 일화는, 그만큼 이별이 힘들고 슬픈 일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옛 전설들 중에는 이처럼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의 애달픈 사연이 서린 장소는 지금까지도 ‘이별의 장소’로 구전(口傳)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이별의 길’, 과연 어떤 곳일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석강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 해안에 위치한 채석강은 자연이 빚은 퇴적예술의 걸작이라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수 천 만년 동안 바닷물에 깎인 바위절벽과 자갈, 모래, 켜(층리)는 살아 움직이는 병풍을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강에 이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양반 댁에서 일하는 백정이 있었다. 이 백정에게는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양반집 규수를 몰래 사모했던 것. 엄격한 신분사회인지라 백정의 아들은 양반집 규수에게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상사병으로 한 맺힌 삶을 마감했는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알고 보니 양반집 규수도 백정의 아들을 사모했던 것. 시간이 흘러 양반집 규수는 어느 양반댁 자제와 결혼을 하게 됐지만, 행복하지 못했던 그 여인은 결국 채석강에 몸을 던졌다는 내용이다.
그 후로 여인의 혼불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백정의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으며, 특히 연인들이 채석강을 걷게 되면 강에 서린 여인의 한(恨)이 그들의 사랑을 시기해 헤어지게 만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 가면 무조건 헤어진다. 강화 석모도

강화 석모도는 작고 아름다운 섬으로 일몰이 아름답고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경치가 좋아 영화 <시월애>와 <취화선>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도 연인들의 발걸음을 잠시 머뭇거리게 만드는 곳이다. 이곳을 다녀간 커플 대부분이 여행 후 이별로 이어진다는 후문.
소문의 진상은 이렇다. 옛날에 몹시 사랑했던 남녀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는데, 결국 마음이 변한 남자가 여자 몰래 섬을 빠져 나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여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목숨을 끊었고 여자가 묻힌 땅에서는 해마다 붉은 해당화가 피어난다는 것이다. 죽은 여자가 한(恨)을 품었다는 소문으로 인해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이곳을 걷게 되면 이별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별의 종착역 강릉 정동진


정동진은 연인들에게 극과 극을 달리는 장소다. ‘사랑이냐, 이별이냐’ 둘 중 하나라는 얘기다. 해마다 연인들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12월 31일 정동진을 찾아온다. 그리고 일출을 보며 사랑을 만드는 연인이 있는가 하면 이별을 고하는 연인도 있다.
이야기는 정동진 주변에 위치한 헌화로에서 시작한다. 성덕왕대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던 길에 화려한 미모를 지닌 순정공의 부인이 절벽 위에 핀 꽃을 꺾어 자기에게 바칠 사람이 없냐며 도발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절벽 위로 올라갈 남자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수로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주저 없이 절벽 위로 올라갔다. 결국 노인은 꽃을 꺾어 부인에게 받쳤고 그 후 한줌의 미련도 없이 수로부인 곁을 떠났다고 한다.
문제는 이 헌화로에서 남자가 꽃을 선물할 때, 이것은 “함께 자고 싶다”는 의사표시인데 과연 여자가 그 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이곳 정동진이 이별의 종착역이 될지, 사랑의 출발점이 될지 판가름 난다는 것.
뭐 사실, 밤기차를 달려 이곳까지 오는 데는 각자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무박 여행’임을 굳이 강조하는 남자나, 그 말을 믿고 오는 여자나. 아무튼 정동진의 사연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정유진 객원기자 yjin78@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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