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 “회사 차리는 데 졸업장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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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학력이 대수인가. 신정아를 필두로 유명인의 학력 위조 실태가 밝혀지면서 거짓 학력을 고해성사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학력 노이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 중 누가 진정으로 학력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취업인사포털 인크루트의 이광석 대표는 “인재는 학력이 아니라 열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학력이 구직에 미치는 영향을 몰라서, 혹은 어떤 코멘트를 언론이 좋아할지 너무 잘 알아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10년 전 그 역시 학벌 대신 창업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어딜 보게 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눈을 가장 먼저 본다. 그런데 인크루트 이광석(34) 대표를 만났을 때는 그의 눈보다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이폰이 들려 있었던 것. 한국에서는 팔지도, 터지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어떻게 들고 있는 것일까.

“지난 6월 뉴욕에서 열린 한 기업인 세미나 마지막 날이었죠. 그날은 마침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세미나 내내 뉴욕대 교수들이 다들 그 아이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궁금했고 갖고 싶었죠. 다음날 새벽 한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일정상 구입이 불가능했죠. 결국 밥 먹는 중간에 뛰쳐나와 한 대 샀습니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니 ‘다들 나도 살 걸’하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은 이 대표밖에 없었다.

“결단의 순간이오? 어떤 기회가 왔을 때, 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가슴이 터질 듯한 순간이 아닌가요? 그때 손을 번쩍 들어야죠.”

남들은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그는 해왔다. 그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기 위해,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는 것 같은 것 말이다. 이광석 대표는 연세대 천문학과를 중퇴했다.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 명문대를 박차고 나온 것은 모두 “인터넷 탓”이었다. 그는 원래 별을 관찰하고 우주를 공부하는 것이 꿈이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처럼 되고 싶다던 그의 꿈은 갑자기 닥친 인터넷의 매력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그에게 새로운 우주였던 것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 경진대회마다 상을 타던 소위 컴퓨터 도사였기 때문에 한번 발을 들이자 걷잡을 수 없었다. 1995년 국내 최초의 인터넷 동호회인 나우누리 ISF(인터넷 스터디 포럼)에서 주인장으로 활동하던 것이 97년 3월 국내 최초의 한·영 동시 검색엔진 집(zip)까지 만들게 된다.

그가 인터넷 공부에 몰두하게 된 것은 공익근무요원이었을 때다. 연세대 앞 창천교회 옆 골목 ‘인터게이트’라는 이름의 국내 3호 인터넷 카페 사장에게 인터넷 연구를 도와 달라고 졸랐다. 결국 그는 공짜로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그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낮에는 영등포구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개발에 전력했다.

“1996년 11월 15일 공익근무가 끝났습니다. 그때 이미 머릿속은 검색엔진 개발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남들은 인터넷이라는 영어 단어를 읽을 줄 몰라 ‘인테넷’이라고도 하던 시절, 그는 인터넷 때문에 휴학을 결정했다. 보통 복학생들이 공부와 취업에 매진하는 것과는 다른 결정이었다. 부모님도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대학 진학할 때도 보통의 부모들은 취직 잘되는 컴퓨터공학과를 가라고 했겠지만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라”며 천문학과 가는 것을 응원해주셨다. ‘동호회 활동하겠다고 학교 그만둬도 되는 것인가’ 고민하던 그에게 부모님의 지지는 큰 힘이 됐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그 사이 취미가 어느덧 일이 돼 있었다. 논현동 한국산업협회 사옥 구석에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다. 10명이 컴퓨터 한 대씩 앞에 놓고 앉아도 넉넉히 차고 넘치는 공간이었다. 당시 정부는 정보검색사라는 시험을 만들려고 추진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검색을 자격증으로 만든다는 게 우습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아직 보급되지 않았을 때다.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그 결과 자격증은 생기지 않았다. 이때 그의 열정을 눈여겨본 한국산업협회에서 사무실을 지원해준 것이다.

그때 함께 사무실 지원을 받아 동고동락한 5개 업체 중 하나가 시도한 게 ‘피플스퀘어’라는 서비스였는데 바로 오늘날 ‘싸이월드’의 전신이다. 때마침 삼성SDS에서 연락이 왔다. 함께 일해보자는 것이었다.

“창업 꿈꾸는 공대생 없더라”

“그때 너무 기뻤습니다. 그 당시 연락을 주신 분이 삼성SDS의 과장이었던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씨였습니다.”

논현동 사무실에 모인 10명이 적지만 보수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고시생·직장인·학생 등 다양한 10명의 동호회원은 이 대표처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생업에서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표는 창업이 아닌 NGO를 꿈꾸고 있었다.

인터넷이 개방과 공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듯 자신의 일은 사업용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오히려 NGO처럼 지원을 받아 성과물을 사회에 나누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벤처’란 말도 없었기 때문에 사업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1년이 되자 네이버에 용역을 제공하고 있던 협력사에 들어와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러나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싫었습니다. 일에 열정이 사라지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죠. 추석이나 설에 집에 가면 다들 묻잖아요. ‘이제 취직 안 하느냐고’. 결국 하나 둘 자기 갈 길 가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삼성SDS 임원들이 볼 때는 저희들 하는 일이 소꿉장난처럼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은 냉정하지 않습니까. 제 디렉토리 서비스도 대기업, 외국기업들에 밀리더군요.”

자신의 뜻과는 다른 회사에는 들어갈 수도, 좋아하는 일을 관둘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때 처음 창업을 생각했다. 또다시 복학의 시기가 찾아왔지만 이번엔 주저 없이 휴학을 선택했다. 그때 인크루트 공동창립자 겸 이사인 서미영씨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녀는 “인사정보포털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구직의 의미커지고 있는 것을 간자한 것이다.

대학을 포기하고 회사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이 이렇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몇 번의 부침을 겪은 뒤 2006년 매출 176억짜리 회사로 키워냈다. 설립 9년 만의 일이다.

그는 “처음엔 가십거리가 될까봐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요즘 학력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명문대 강의를 다녀온 후 “자신의 이야기나마 하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하게 됐다.

그는 해마다 명문 공대생들에게 “최근 무엇에 미쳐 밤을 새워 본 적 있는 사람은 손 들어보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올해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단 한 명의 학생만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업하고 싶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는 “어디 나왔느냐보다 지금 여기 왜 있는지 고민하는 열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하고 싶어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그가 사장이 되는 데 대학졸업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꼭 하고 싶은 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래서 직원과의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건배한다.

“저보다 학력 낮으신 분 없으시죠. 모두 힘냅시다. 건배.”

직원 각자가 학력이나 조건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럼에도 ‘졸업할 걸’ 하는 후회는 없을까. 그는 “전혀 없다”고 대답한다. 최근 학위 과정은 아니지만 GLA(서울대 문화콘텐트 최고경영자 과정) 3기 수강 중이긴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그 흔한 최고경영자 과정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서류상의 휴학, 그러나 그는 언제든 손을 들 준비는 돼 있다.

1974년 서울 출생
1993년 대일고 졸업
1993년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입학
1997년 국내 최초 한영 Directory Service ZIP 출시
1998년 취업인사포털 인크루트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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