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40년 의사로 살았지만 피 못 속이는 경영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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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 종로5가가 훤해졌다. 좁다란 골목에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던 이곳에 최첨단 명품 공연장이 들어선 것. 연강문화재단이 250여억원을 들여 기존의 연강홀을 ‘두산아트센터’로 재탄생시켰다. 250억원이면 웬만한 대형 공연장을 새로 건립할 수 있는 금액이다. 역대 공연장 리노베이션으론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셈이다.

 게다가 두산아트센터는 대형 공연장이 아닌 중·소형 공연장이다. ‘등판 없는 좌석에 케케묵은 냄새 가득한’ 기존 공연 인프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의미 있는 사건이다. 10월 1일 재개관을 앞두고 두산아트센터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박용현(64) 연강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박 이사장은 이전까지 서울대병원장을 역임하는 등 의사로만 일해왔다.

 -250억원이면 큰 돈이다.

 “때가 잘 맞았다. 연강문화재단의 모기업인 두산그룹이 최근 좋은 실적을 냈다. 건설장비·중공업·엔진 등 많은 분야에서 큰 수익을 올렸다. 자금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경영권 분쟁(2005년 ‘두산 형제의 난’을 일컬음) 등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실추됐던 두산의 이미지를 개선해야 했다. 자연스레 사회공헌 활동과 문화 지원에 관심이 쏠렸다. 때마침 두산이 운영하는 ‘연강홀’은 1993년에 건립돼 시설보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참에 제대로 된 문화시설을 하나 갖추어 시민에게 봉사하자’란 의견에 그룹 경영진 모두 공감했다.”

 -대형 공연장이 아닌 중·소형 공연장이다.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 아닌가.

 “알고 있다. 부대시설 등을 활용해도 1년에 최소 20억원, 최대 50억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한다. 돈 벌려고 공연장을 운영할 만큼 바보가 아니다. 적자 이상의 기업 홍보와 이미지 업그레이드 효과를 올릴 것으로 자신한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를 보라. 1년엔 1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낸다. 그래도 하는 건 그 이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으로선 단순한 공연장 운영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두산은 재계 11위 기업이다. 지금까지 이런 기업 규모에 어울리는 사회공헌을 해오지 못한 게 사실이다. ‘두산아트센터’의 개관과 함께 본격적인 문화 메세나 활동을 가동시킬 예정이다. 이미 회사 내 사회공헌 활동 태스크포스팀도 꾸려졌다. 소비자는 현명한 집단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이걸 만든 기업을 떠올리며 제품을 구입하곤 한다. 기업의 사회공헌은 이젠 선택이 아닌 필수다. 기업 수익 창출-사회공헌-기업 이미지 개선-소비자 선택 증가-수익 확대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해야 한다. 기업 이미지가 건강해야 좋은 인재도 많이 모인다.”

 -공연장 경영은 처음인데….

 “서울대 의대에 62년 입학했으니 40여 년간 병원에서만 있어 왔다. 문화 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더 많이 묻고, 책 읽고, 공부하고 있다. 그래도 서울대병원장(98~2004년)으로서 경영은 조금 해봤다. 경영의 원칙은 하나다. 바로 ‘고객 만족’이다. 공연장의 고객이 누군가. 공연을 소비하는 관객과 공급하는 배우·스태프다. 그들을 만족시키면 된다. 여성 관객을 고려해 여성 화장실을 많이 지은 것도, 배우를 위해 최고급 시설의 분장실을 만든 것도 다 ‘고객 만족’이란 원칙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옛날 얘기를 하자. 외과의사로 유명했는데 어떻게 경영 쪽으로 방향을 돌렸나.

 “93년이었다. 당시 원장이셨던 한만청 선배가 나를 덜컥 기획조정실장으로 발령을 냈다. 외과 선배인 터라 거역을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 과와 달리 외과는 군기가 세다. 그때 발을 들여놓아 11년간 병원 행정·경영 일을 맡게 됐다. 특히 내가 서울대병원장이 된 98년은 IMF가 터지고, 삼성의료원·현대아산병원이 생기는 등 서울대병원이 더 이상 브랜드만으론 버틸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서울대병원은 여전히 복지부동·무사안일 등 못된 공무원 기질이란 기질은 모조리 결합해 놓은 권위주의 병원의 대명사였다. 그걸 고객 중심, 환자 중심의 병원으로 뜯어고쳐야 했다. 어느 정도 새로운 병원문화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그렇다면 조금 단순한 질문이지만, 의사와 병원장 중 무엇이 더 좋은가.

 “의사는 힘든 직업이다. 특히 외과의사는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다. 대신 보람도 많다.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일은 신이 의사에게 내려주신 특권이다. 난 지금도 돈 벌려고 의사를 하겠다는 후배는 싫다. 피부과·성형외과가 이렇게 창궐하는 건 이상한 사회다. 반면 의사의 세계는 좁다. 만나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 그런데 병원장이 되곤 세상이 달라졌다. 정치인도 만나고, 청와대도 들어가고, 기업가도 만나야 한다. 정부 부처에 들어가 관계자를 만날 때면 의자에 기대어 앉지 않고 끝부분에 앉아 정자세로 있곤 했다. 조금이라도 잘보여야 정부 지원금을 더 타내지 않겠는가. 그게 경영이다. 병원장이 되고 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의사로 30여 년을 보내다 경영자로도 성과를 냈다. 타고난 기질이 있는 걸까.

 “피는 못 속이는 것 같다. 우리 집안이 3대째 기업 경영을 하고 있지 않나. 경영은 빠른 판단과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핵심이다. 의사로만 외골수로 살았지만 경영을 하게 되자 나에게도 그런 게 생겨났다. 난 그걸 ‘타고난 잔머리 지수, 즉 JQ가 발달됐다’고 말한다.”(웃음)

 -이제 문화예술계에도 발을 들여놓으셨다. 소감이 어떤가.

 “지금껏 만난 사람, 알게 된 지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주제넘다. 난 앞으로도 많이 배워야 한다. 그래도 한마디 하라면, 모든 게 그렇듯 ‘기초가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뜨고 있는 뮤지컬의 기초가 무언가. 연극·무용 등 순수예술이다. 이 분야가 굳건하지 못하면서 뮤지컬이 더 성장하리라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우리 소극장이 ‘아트 인큐베이팅’을 표방하면서 순수예술을 하는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 문을 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초가 튼실해야 한류도 일회성이 아닌, 깊고 오래갈 것으로 확신한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10월 새로 문 여는 두산아트센터
중·소극장, 갤러리 갖춰 여자 화장실도 크게 늘려

 10월 1일 문을 여는 두산아트센터는 고품격 문화공간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지상 1층, 지하 3층의 구조로 중극장(620석)·소극장(230석)·갤러리(사진)로 구성된다. “공연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냥 구경삼아 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을 표방한다.

 어디서나 라벤더 향을 맡을 수 있고, 로비와 통로는 갤러리처럼 꾸몄다. 은은한 불빛, 고급스러운 바닥과 외장, 깔끔한 실내 카페 등도 눈길을 끈다. 특히 여자 화장실은 특급호텔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음악이 흐르고 칸마다 핸드백 놓는 선반이 따로 있으며, 파우더 룸과 아기 기저귀 교환대도 있다. 여성 관객이 공연장에 갖는 가장 큰 불만인 ‘줄 서는 화장실’을 탈피하고자 양변기도 52개로 늘렸다. 아이를 데리고 온 관객을 위해 객석 뒤편에 모자방(mom’s room)을 두었다.

 객석 의자 단가는 개당 100만원이 넘는다. “착석감과 견고함을 위해”라고 극장 측은 말한다. 중극장의 경우 좌석 앞뒤 간격이 1.2m(타 극장 평균 0.9m)로 앉은 상태에서 사람 지나가기에도 별 불편이 없는 편.

 규모는 작지만 개성 있고 탄탄한 작품성 위주의 공연이 올라갈 예정이다. 소극장은 재즈 뮤지션 ‘나윤선 콘서트’가 개관 공연을 장식한다. 이후 서울세계무용축제와 연극 ‘나쁜 좌석’ ‘죽도록 달린다’ 등이 이어진다. 중극장은 여성 모노 뮤지컬 ‘텔 미 온 어 선데이’가 개막작이다. 내년 3월엔 세계 최고의 뮤지컬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컴퍼니’도 무대에 올려진다. 티켓 가격은 중극장 5만원 이하, 소극장 4만원 이하가 기본이다. 학생은 30%, 혼자 오는 관객은 20% 할인된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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