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클’ 걸린 한국 축구, 언제 일어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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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16면

초가을이지만 한국 축구는 겨울이다. 시베리아 추위도 도망갈 정도다. 한국 축구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신화를 이룩한 뒤 금방이라도 아시아 맹주를 넘어 세계 축구의 주류에 진입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7년 현재 한국 축구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성인대표팀, U-20 대표팀에 이어 U-17대표팀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동반 부진했다, 올림픽팀은 최종예선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강호들이 나오는 본선에서도 힘을 쓸지는 의문이다. 총체적 위기. 늘 ‘우승’을 노렸지만 ‘실패와 좌절의 악순환’이다. 5년 전 한반도를 붉게 물들이며 우리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던 한국 축구의 영광은 석양을 맞은 것일까?

잇단 부진에 ‘태극전사 위기론’

월드컵 4강의 어두운 그림자

월드컵 4강. 달콤했지만 중독성이 너무 강했다. 실력 외에 ‘운’이 따랐던 결과였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 4강’은 각급 대표팀 성적의 기준이 됐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4강 임팩트가 강해 한국 축구의 현주소가 묻혔다. 장기 발전안보다는 대회가 눈앞에 닥치면 벼락치기로 준비해 부진이 반복됐다”고 진단했다. 냉정하게 짚어보자. 한국의 아시안컵 우승은 1960년, 아시안게임 우승은 1986년이 마지막이다. 2002년을 전후로 한국 축구의 전력엔 큰 차이가 없다. 매 대회 4강과 8강 언저리를 맴돌았을 뿐이다. 기대만으로 축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전 대표팀 감독의 멘트는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축구계는 월드컵 4강 이후 어떤 경기든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지겹다, '킬러 부재'란 말

2007 아시안컵에서 A대표팀(성인대표)은 3경기 연속 무득점, U-17(17세 이하)월드컵에서는 2경기 무득점의 졸전을 펼쳤다. 특히 A대표팀은 올해 11경기에서 9골에 그쳤다.

5경기에서 ‘0골’을 기록했다. 아시아 국가들에는 강했지만 네덜란드·우루과이 등과의 대결에서는 여지없이 노골이었다. 해결사가 없었다. 1990년대 특급 킬러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아르헨티나)는 A매치 78경기에서 56골을 기록했다. 경기당 0.71골이다.

‘킬러’ 소리를 들으려면 경기당 0.4골은 뽑아야 한다. 한국 축구에서는 차범근(121
경기 55골·0.45골), 황선홍(103경기 50골·0.49골), 김도훈(71경기 30골·0.42골) 등이 기준을 넘는다. 이들과 견줄 만한 현역 스타가 없다. 이동국(71경기 22골·0.31골)과 설기현(75경기 16골·0.21골)이 눈에 띄지만 역부족이다. ‘천재’라는 박주영도 A매치 20경기에서 5골(0.25골)을 넣었을 뿐이다.

상대를 흔들 수 있는 개인기 부족

1960~70년대 한국 축구의 키워드는 ‘투지’였다. 선수들은 뼈가 부러지더라도 태극마
크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하지만 2000년에 접어들면서 이 같은 의식은 약해졌다.

‘해외진출’과 ‘연봉’이 아니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이런 선수들이라면 개인기가 좋아야 한다. 하지만 축구 강국 선수들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떨어진다. 울산 현대의 임종헌 코치는 “U-17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은 상대 선수를 제치지 못했다. 상대를 흔들어주는 기량을 우선적으로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족한 개인기 때문에 경기운영도 안전 위주다. 수비형 미드필더 2명까지 수비라인에 가세해 지키는 축구를 한다. 축구에 색깔이 없고 재미가 없다.

K-리그 핵심은 외국인 선수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축구 강국인 이유는 세계 최고 수준인 프리미어리그와 프리메라리가가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한국엔 K-리그가 있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와 중앙수비수 자리는 외국인 선수에게 내준 지 오래다. 눈앞의 성적 때문이다. 젊은 토종 공격수들은 출전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축구 유망주들도 미드필더를 선호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초래했다. 또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도 K-리그를 흔든다. 앞에선 ‘상생’을 외치고 뒤에서 ‘감독 빼가기’(올림픽대표팀 박성화 감독) 같은 찬성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다. 대표팀 지상주의의 산물이다.

500억 확보, 재기 위한 실탄은 충분

절망을 말하기엔 이르다. 올해 협회는 스폰서 계약으로 분주했다. 14개 기업에서 후원액만도 200억여원을 넘는다. 유니폼 스폰서 계약도 올해 말에 갱신된다. 나이키·아디다스가 뛰어들었다. 스폰서료가 최소 ‘500억원+α’에 이를 전망이다. 도약을 위한 ‘실탄’은 충분하다. 이제 움직여야 한다. 각급 대표팀의 현주소를 인정하고, 이에 걸맞은 중장기 프로젝트를 수립해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시급한 것은 축구 유망주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다. 특히 토종 킬러 육성이 급하다. 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어릴 때부터 골 넣는 습관을 길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선진축구 유학을 통해 킬러의 본능을 체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올림픽팀 멤버에게 희망 건다

내일의 태양은 아직 뜨지 않았다. 동녘이 밝으니 희망은 있다. ‘젊은 피’들이다. 부상에서 회복한 박주영(서울)을 비롯해 이상호(울산)·기성용·이청용(서울)·이근호(대구) 등 올림픽팀 멤버들의 기량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 이들은 신속한 볼처리 능력과 뛰어난 패싱력, 지능적인 움직임으로 경기를 푸는 능력을 지녔다. 공은 축구인들에게 있다. 현실에 안주해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면 한국 축구는 회복 불능이다.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한국 축구는 월드컵 4년주기로 똑같은 문제를 되풀이했다. 원인이 나와 있는 만큼 축구인들이 배타적 자세를 버리고 해결책을 위해 합심하지 않는다면 공멸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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