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는 와인을 모시는 파트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호 29면

며칠 전 재미있는 와인글라스를 많이 비치해뒀다고 소문이 난 상점에 다녀왔다. 둘러보니 다리(스템)가 꼬불꼬불한 잔이며, 볼 부분이 사각인 잔, 글라스의 색깔이 불투명한 검정이나 진홍색인 잔 등 디자인에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다면 재미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와인 파트너로서의 글라스’는 전무했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글라스는 아름다운 와인의 색깔을 즐길 수 없으므로 실격이다. 진열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입구가 벌어진 경향을 보이는 글라스도 실격. 마실 때 향을 맡기 위해서는 입구 부분이 다소 오므라져야 한다. 나는 약간 실망하여 “와인을 전혀 모르는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가게를 뒤로했다.

와인에 빠져들면 누구나 와인글라스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나도 예전에는 결혼식에서 답례품으로 받은 명품 와인글라스를 식기장에 죽 진열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와인에 심취한 뒤로는 모양만 중시하는 와인글라스에 전혀 매력을 느낄 수 없게 되어 다른 이에게 전부 주고 말았다. 와인글라스는 보기에 아름다운 것만이 다가 아니다. 즉, ‘디자인이 우선’이어서는 안 된다. 이상적인 와인글라스는 ‘와인이 우선’이며, 와인의 매력을 잘 살렸을 때 최고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이상적인 와인글라스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다다르는 곳은 역시 ‘리델’의 와인글라스가 아닐까.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최고급인 ‘소믈리에’ 시리즈다. 하지만 이것은 개당 1만 엔이나 하는 데다 매우 얇아서 쉽게 깨지는 것이 흠. 남동생은 몇 년 전까지는 “글라스는 역시 ‘소믈리에’지”라며 집에서 여는 와인 모임에도 ‘소믈리에’ 시리즈를 내놨다. 하지만 취객이 깨고, 남동생 본인도 깨고, 접시를 닦는 사람도 깨고…. 그러는 동안 너무 신경을 소모했는지 동생도 와인 모임에서는 그보다 등급이 낮은 ‘비넘’ 시리즈를 쓰게 되었다. 참고로 나는 손님과 마실 때와 집에서 조용히 와인을 즐길 때는 ‘리델’의 ‘익스트림’을 사용한다. 이것 역시 글라스 하나에 3000엔대로 결코 싸다 할 수 없지만, 실수로 깨버려도 그런대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연재만화 ‘신의 물방울’을 위해 남동생과 시음할 때는 980엔짜리 ‘리델’의 ‘오버추어’를 애용하고 있다. 형태는 와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고안돼 있고, 유리 제품이라 쉽게 깨지지 않는다. 기능적으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단지, 몇 년째 사용하다 보면 적포도주의 색깔이 연하게 물드는 것이 단점이다. “핑크색 글라스로 마시면 기분이 안 사니까 가끔 ‘소믈리에’로 시음하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술에 취해 깰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결국에는 ‘오버추어’를 택하게 된다.

와인의 이상적인 파트너 ‘소믈리에’. 하지만 이것은 늘 사용하기보다 꿈의 연인으로 식기장에 고이 장식해두는 편이 낫다. 잘못 다뤘다가 깨지는 건 아닐지 가슴 졸이며 마시는 와인은 아무리 맛있어도 심장에 해로울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와인 시음기-와인글라스 고르기
글라스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와인이 있어도 글라스가 빠지면 제 맛이 안 난다. 필자는 고가의 와인을 테이스팅하거나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는 꼭 개인 글라스를 가지고 다닌다. 글라스에 따라서 와인 맛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르도 와인글라스는 볼이 깊고 넓은 형, 반대로 부르고뉴 글라스의 경우 아래쪽의 볼륨이 생기다 위로 갈수록 퍼지는 벌룬형이 좋다. 화이트 와인은 레드보다 글라스가 작은 편인데 낮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샴페인의 경우 날씬하고 긴 형태의 글라스가 적합하다. 와인을 제대로 테이스팅할 수 있는 글라스는 얇고 입에 닿는 촉감이 뛰어나며 표면에 무늬가 없는 것이 좋다.
국내에 수입되는 글라스 중 가장 먼저 론칭한 ‘리델(Riedel)’은 오스트리아산으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진열되어 있을 정도로 디자인과 품질을 인정받은 제품이다. 아기 다다시도 썼듯이 ‘소믈리에’부터 ‘레스토랑’까지 꾸준히 여러 시리즈를 생산한다. 이 가운데 필자가 추천하는 글라스는 ‘소믈리에’ 시리즈다. 입술에 닿는 촉감이 뛰어나며 넓고 깊은 볼은 최대한 많은 향을 모아서 올려주기 때문에 다양한 향을 느낄 수 있는 데다 길고 얇은 다리(스템)는 우아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값이 비싸고(‘보르도’ 잔은 소비자가 9만3000원) 탄성이 약해 글라스가 잘 깨지는 게 흠이다.
독일산 ‘슈피겔라우(Spiegelau)’는 가볍고 튼튼한 편으로 고가의 ‘윌스베르거’부터 ‘베벌리힐스’까지 다양한 시리즈가 나와 있다. 필자가 권하고 싶은 건 ‘아디나’ 시리즈(소비자가 4만2000원)로 우아한 곡선에 적절한 탄성을 지녀 집에서 쓰기에 맞춤하다.
‘미카사(Mikasa)’는 프랑스에서 만든 최신 제품으로 유명 소믈리에와 와인 컨설턴트, 디자이너가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필자 추천 시리즈는 ‘오픈 업’으로 디자인은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기능성은 뛰어나다. 글라스는 용도에 따라서 여러 브랜드로 나뉘고 글라스마다 장단점이 있으니 와인 애호가라면 자기 취향에 맞는 좋은 글라스를 찾아보는 것도 삶의 재미가 될 것이다. 이준혁(소믈리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