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살인 부른 일임매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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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거래고객의 손해배상요구에 시달려온 증권회사 간부직원이 고객의 집에 불을 지르고 함께 죽은 방화살인사건은 우리 증권업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돼온 증권회사간의 약정경쟁과 이에 따른 불법적인 일임·임의매매가 그 근본원인이었다. 외형을 중시하는 경쟁풍토하에서 증권회사들이 서열매김의 기본 잣대로 삼아온 약정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풍토속에서는 또 다른 자살·살인극이 언제라도 생길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증권사들은 저마다 자사의 위상제고를 위해 직원들의 약정고를 높일 것을 요구한다.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인사고과에의 반영은 물론 공공연히,또는 내부적으로 약정고에 따른 성과급제를 실시한다.
증권사간,또는 내부 직원간의 경쟁이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도가 지나칠 경우 사단이 벌어진다. 경쟁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뭔가 비정상적인 방법도 동원해야 할 압력과 유혹을 느낀다. 일임·임의매매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일임매매는 「자신의 판단과 책임하에」라는 투자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 따라서 증권거래법 107조는 수량·가격·매매의 시기에 한해 그 결정을 일임받아 매매거래토록 제한규정을 두고 있다. 종류·종목 등은 반드시 고객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국내 증권업계의 풍토는 그렇지 못하다. 증권회사나 그 직원,투자자들 사이에 이뤄지는 일임매매는 대부분 종류·종목을 포함하는 완전한 일임이다. 지난해 증권사 노조협의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증권사 영업직원의 절반이상이 회사가 할당한 약정고를 채우기 위해 고객의 돈을 임의로 굴리고 있으며,그 규모는 직원 1인당 3억원이란 통계가 나왔다. 또 석달에 한번이라도 거래를 한 전체 활동계좌중 43%가 일임매매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일임매매는 원칙적으로도 옳지 않을뿐더러 이를 통해 손해가 생길 경우 문제는 더욱 커진다. 투자자는 거래 직원에게 손해보전을 요구하고 증권사는 분쟁을 직원과 고객 양자간의 문제로 돌린다. 이번의 방화살인극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증권사들도 이런 문제점을 알면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 약정경쟁을 지양하고 수익률 경쟁을 하자는 분위기가 일기도 했으나 일과성 캠페인으로 끝났다. 최근에는 일부 증권사에서 억대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등 약정고에 따른 성과급제 도입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증권감독원이 이를 자제하도록 촉구했으나 얼마나 말이 통했는지 의문이다.
이제라도 달라져야 한다. 증권회사의 세과시적 약정경쟁은 의당 거래고객에게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려줬나를 따지는 수익률 경쟁으로 바뀌어야 한다. 투자자들도 증권사 직원 등의 조언은 듣되 최종판단은 자신이 하는,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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