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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1> 테레사 수녀가 신을 부정했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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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봄이었죠. 재가불자들과 함께 고우(古愚·70·경북 봉화 금봉암 조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스님을 모시고 중국 출장을 갔습니다. 하루는 스님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죠. “사람들은 저보고 ‘깨쳤다, 깨쳤다’ 하는 데 아닙니다. 저는 깨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얇은 막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순간, 버스 안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숙연한 분위기였죠. 누구나 인정하는 ‘선지식’이 “나는 깨치지 못했다”라고 말했으니까요.

 잠시 후 휴게소에서 버스가 섰죠. 저는 스님께 가서 “아침 법문,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죠. 어떤 사람에겐 그게 ‘당혹스런 법문’ ‘실망스런 법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겐 ‘나’와 ‘달’, 그 사이에 존재하는 한 뼘의 간격을 말하는 법문은 그 어떤 법문보다 울림이 컸습니다.

 왜냐고요? 그 속에선 인간이란 존재의 ‘뿌리 깊은 나약함’과 그걸 넘어서려는 ‘절절한 가능성’이 함께 보였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그게 ‘인간’이죠. 인간은 끊임없이 신을 향하고, 끊임없이 절망하고, 끊임없이 고통받고, 그러면서 또 끊임없이 신에게 다가서려는 존재죠.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의 공개되지 않았던 편지와 개인적 기록이 화제네요. 이들 글에서 테레사 수녀는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사랑이었던 저는 지금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하느님의 부름에 맹종한 저는 진정 실수를 한 것일까요’라는 절망적인 말까지 던집니다. <중앙sunday 9월2일자 26면>

 이걸 두고 혹자는 “테레사 수녀가 신을 부정했다”고 하네요. 또 다른 이는 “절망감 속에서도 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 테레사 수녀가 위선적”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봅니다.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생애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와 함께했다’고 말한다면 그게 ‘위선’이지 않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저는 테레사 수녀의 신앙과 그가 베풀었던 사랑을 믿지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테레사 수녀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와 하느님 사이의 간격’을 끌어안은 채 신에게 한 발짝씩 다가설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아침에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도 밤이 되면 안 들릴 수 있죠. 가슴 밑바닥에서 느꼈던 하느님의 숨결도 돌아서면 잊힐 수 있죠. 그게 바로 신을 향해 가는 ‘인간의 험난한 길’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여, 당신이 버린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테레사 수녀의 가슴 절절한 절규 앞에 저는 무릎을 꿇습니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신에게서 멀어지는 ‘나’도 보이는 법이겠죠. 그렇게 ‘버려진 나’를 봐야만 신을 향해 다시 나아갈 수도 있겠죠. 결국 테레사 수녀가 부정한 건 ‘하느님’이 아니겠죠. ‘하느님’을 가리고 있는 ‘나’를 끊임없이 부정한 게 아닐까요.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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