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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을살리자>26.밤-밤톨 단단하고 단맛 뛰어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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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40대 이상이면 누구나 가을철 비바람부는 새벽에 종다래끼를 차고 아람을 주우러 밤갓에 갔다가 개밤송이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혼이 난 적이 한두번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추억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웬만한 사람치고 밤이 우리나라 농산물 가운데 가장 많이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밤은 풍년이 든 92년 10만1천t의 생산량 가운데 30%가넘는 3만3천t이 일본등 10여개 나라로 수출돼 1억2백만달러를 벌어들인데 이어 지난해는 생산량 8만1천t 가운데 2만6천t이 팔려나가 9천5백만달러의 수출고를 기록했다.우리 밤이 이같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다른 작물과는 달리 일찌감치 토종을 수집.보존한 덕분.경기도수원의 산림청 임목육종연구소에서는 국내 밤나무에「사라호」로 불리는 58~65년사이의 밤나무혹벌 태풍이 닥치기전인 56년부터 토종밤 1백57가지를 수집,보존하고 있다.
연구소는 그동안 토종밤 가운데서도 특히 맛이 뛰어나고 질병에강한 산대(山大).중흥(中興).옥광(玉光).광주올밤(廣州早栗)등 12가지를 골라 일본종 銀奇.利平.伊吹등과 교잡해 廣銀.州玉.銀山.伊大등 신품종 4가지를 개발해 보급한데 이어 최근에는토종 상면과 일본우량종 筑波.岸根을 이용,혹벌에 걸리지 않고 추위에 강한 슈퍼품종을 만들어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밤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북미등 북반구 온대지역이 원산지로 남반구에서는 나지 않는데 우리 토종에 대한 역사는멀리 삼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馬韓에서 크기가 배(梨)만한 밤이 난다」고 적고 있는 중국의 사서『三國志』(魏志東夷傳),『後漢書』의 기록이나「백제에 큰밤이 난다」고 기록한『隋書』와『北書』등의 내용으로 보아 이미 당시에도 우리 토종밤이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음 을 알 수 있다. ◇종류=토종밤은 크게 만주 남부로부터 평안.함경도지역에 분포하는 약밤(일명 咸從栗)계통과 남한지역에 고루 퍼져 있는 큰밤계통등 두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토종밤의 주종은 경기 양주지방에서 많이 난다해서 통칭 양주밤으로 불리는 큰밤 계통의 것들.일제때 만들어진『朝鮮農業大典』에「경기도 양주와 개성등지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나무가 장대하고 밤톨이 굵고 속껍질은 잘 벗겨 지지 아니하며 맛은 감미가 중품이고 소출은 많으니 성숙하는 시기는 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양주밤은 모양과 크기.색깔등에 따라 불밤.
병밤(甁栗).콩밤.술밤(酒栗).잿밤.먹밤.납밤(蠟栗).왜밤.팥밤.두더지밤.자주밤(紫栗).어궁밤(御宮 栗)등이 있다.
이 가운데 콩.왜.팥자가 들어가는 밤은 밤톨이 잔데서,병밤은밤톨이 길쭉한게병을 닮아 각각 이름붙여졌는데 껍질이 얇고 맛이고소한데다 살이 단단해 오래 저장해도 썩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또 밤송이 색깔이 불붙은듯 붉은 불밤,겉껍 질에 털이 빼곡이 난 두더지밤,밤톨에 털이 있고 익으면 회백색을 띠는 잿밤,밤톨의 윗부분에만 털이 나는 납밤등이 있고 속살의 색에 따라 막걸리 색이면 술밤,흑갈색은 먹밤,자주색은 자주밤등이 큰 밤계통의 토종밤이다.
이에따라 고을마다 특산밤의 종류도 각기 달랐는데 양주의 불밤.병밤.콩밤,가평의 잿밤.먹밤.납밤.불밤,수원의 어궁밤.불밤,용인의 술밤등이 각각 이름을 날렸다.
이밖에 다른 지방 특산으로는 밤톨이 굵고 살이 진한 자주빛이며 적당히 수분을 함유해 부드러우면서도 단맛이 매우 뛰어난 전남광양의 굵은밤,적갈색 밤톨에 세로줄이 뚜렷하고 9월말부터 20일 간격으로 세차례나 밤이 열려 수량성이 뛰어난 충남연기군금남면감성리의 감성밤등이 유명하다.그러나 이같이 다양한 특성을 지닌 토종밤들은 58년부터 퍼지기 시작한 밤나무혹벌에 의해 거의 쑥밭이 되다시피하면서 땔감용등으로 나무가 베어져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육종=다만 이 와중에서도 불행중 다행으로 육종연구소가 61년부터 살아남은 밤나무 가운데 비교적 피해가 심하지 않은 품종들을 골라 육성,보급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맥을 잇게 되었다.
당시 지역별로 선발,육성된 품종은 玉光.山大.上林.順城.百中.中興.長位.廣州올밤등 12가지.경기도 광주에서 선발된 옥광은갸름하지만 무게가 15g정도로 고르며 광택이 뛰어나고 당도가 높으면서도 혹벌의 피해를 전혀 보지 않는등 충해에 특히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이들 선발품종들은 70년대초반 한때 전국에보급돼 인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이후 생산량이 많은 모리와세(森早生).단자와(丹澤).이부키(伊吹)등 일본종의 도입으로 밀려 현재는 전체 밤나무 재배면적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기술로 개량된 새로운 품종들이 세계적으로 최고라는 일본종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점이나 일본종 역시 일제때가져간 우리 토종을 바탕으로 개발됐을 것이란 학계의 추정으로 보아토종밤의 우수성을 앞세워 세계 밤시장을 석권할 날 도 그리멀지만은 않을 것이다.
〈李晩薰.鄭泳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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