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인간의 가장 달콤한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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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작가 토니 헨드라는 소설 『조 신부님(Father Joe)』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간통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14세 소년이 유부녀와 불륜관계를 맺는 내용으로 미국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소설에서 작가는 ‘불행한 영혼들의 멘토’, 조 신부님을 통해 진정하게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달콤한 죄, 간통은 그 달콤함 때문에 인류와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도 남의 아내를 탐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유효한 것이었다. 이 땅에서도 고조선 때부터 달콤한 범죄의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통에 대한 기록이 1775건이나 나온다.

 물론 간통은 시대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졌다. 간통은 일부일처제가 확립되면서 생겨난 범죄로 고대국가 형성과 함께 이미 제도화됐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간통죄는 주로 부인의 부정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고조선 때 “부인의 몸가짐이 깨끗했다”는 기록을 봐도 그렇고 부여에서 “여자가 투기(妬忌)하면 모두 죽였다”는 기록도 그렇다. 백제 또한 “간통한 부인을 남편 집 노비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조에서 간통죄를 다스린 범간율(犯奸律)에 따르면 “무릇 화간(和姦)은 장(杖) 80대이고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 여자를 속임수로 꾀어 간통한 조간(<5201>姦)은 장 100대이며 강간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고 돼 있다. 그래도 대개의 경우 남녀의 처벌 강도는 차이가 났다. 세종 때 형조가 올린 보고를 보자. “전의판관 황순지의 아내 세은가이가 자식 가진 남편을 배반하고 유흥수와 간통했으니, 율을 상고하건대 세은가이는 교형에, 유흥수는 곤장 100대와 3000리 밖 유배에 해당합니다.” 남자가 여자와 함께 극형을 받는 경우는 종이 양반집 부인과 통정했을 때나 천민끼리 관계했을 때 정도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의미가 바뀐다. 간통죄는 돌연 뒤돌아서 남자들을 향해 날을 세웠다. 특히 이 땅에서는 그랬다. 세상 모든 나라가 간통죄를 자연사박물관에 진열할 지경이 됐어도 우리만은 굳건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간통죄가 자리를 지켰었다.

 그런데 세상이 또 한번 뒤집혔다. 아뿔싸, 엊그제 중앙선데이 기사를 보니 간통죄가 더 이상 여성의 무기가 아니라는 거다. 2005년부터 내려진 간통 관련 판결을 분석해 봤더니 남편이 부정한 아내를 고소한 경우가 더 많았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이젠 상당수 여성단체조차 간통죄 폐지에 찬성하고 있다는 거다.

 이제 정말 세상이 달라졌나 보다. 간통이 더 이상 남자·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국가가 개입할 여지가 있겠나. 하물며 ‘이불 속’까지야. 간통을 남이 해도 스캔들이 아니라 로맨스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고무되지는 마시라. 간통죄가 없어진다고 도덕적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결혼은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결말이 늘 해피엔딩이 아님은 분명하다. 화제가 됐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그 ‘여자’는 자신이 빼앗은 친구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지 않는가. “우리 벌써 적당히 식어 가고 있잖아.”

 조 신부님은 말한다. “섹스가 왜 나쁘니. 섹스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란다. 하지만 타인을 해치거나 이용하기 위해,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한다면 그건 죄가 되는 거야.” 조 신부님에게 “인간이 저지르는 단 하나의 죄는 이기주의”다. 내 욕망에 앞서 배우자를 배려하고 남을 배려한다면, 그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한다면 간통죄가 있든 없든 몸가짐이 달라질 게 없을 터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