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떨어지는 환율 잡기에 나선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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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중견 전자업체인 S사의 K모 이사(45)는 요즘 원화 환율의 움직임만 보면 안절부절 못한다.

올해 대규모 설비를 해외로부터 들여올 계획이지만 원.달러 환율이 연일 널뛰기를 하는 바람에 언제 자금을 투입하는 게 유리할지 판단이 안서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업들의 수출을 돕기 위해 유례없이 역외선물환시장(NDF) 규제라는 '칼'까지 뽑아들며 강도높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부작용을 걱정하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경기회복을 위해 환율을 떠받칠 필요가 있다지만, 외환당국이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해 외국의 투기세력과 힘겨루기에 나설 경우 역효과가 더 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외환시장 주변에서는 정부가 1997년 외환시장의 대세와 맞서다 외환보유액을 탕진했던 교훈을 잊어버린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정부의 고민=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의 강도를 높이는 이유는 최근 '내수침체-수출호조'라는 경기의 양극화 현상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국민이 경기회복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화가치 상승(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수출마저 주저앉게 할 순 없다는 게 정부의 절박한 심정이다. 더구나 눈앞에 닥친 4월 총선을 감안하면 수출 지원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수출이 차지하는 경제성장 기여도는 지난해 2분기 1백7%에서 3분기에는 1백30%로 수직상승했다. 구멍난 내수의 30% 정도를 수출이 대신 막아주고 있는 양상이다. 따라서 내수가 살아날 때까지는 환율방어를 통해 수출이 계속 잘 돌아가도록 불을 지펴줘야겠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정부는 지난해 6월 이후 7개월째 환율이 떨어지는 듯싶으면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여 원화가치를 유지해왔다. 외환보유액이 사상 최대 수준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정부의 시장개입의 결과라는 게 금융계의 분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1천5백억달러를 넘어선 외환보유액 가운데 16%에 달하는 2백34억달러가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을 통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됐다.

◆외환위기의 교훈=문제는 정부가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느냐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미국이 경상적자 개선을 위해 '약한 달러'정책을 유지하는 한 원.달러 환율은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앞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고 분석한다.

산업연구원(KIET)과 삼성경제연구소 등 국내 연구기관은 물론 모건스탠리.골드먼 삭스 등 외국 투자기관들은 올해 연평균 환율을 지난해말 수준보다 달러당 50~1백원 낮은 1천1백~1천1백50원대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 주요국 통화의 움직임을 비교할 때 우리나라 원화만 '나홀로' 약세를 보여왔다는 게 부담스럽다.

지난해 원화가치는 달러화 대비 0.5% 내린 데 반해 유로화가 20% 급등한 것을 비롯해 일본 엔화(11%), 영국 파운드화(10.9%), 대만 달러화(2.3%) 등 대부분의 통화가 달러에 대해 값이 큰 폭으로 올랐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떠받쳐지는 원화는 국제투기세력에 먹음직스런 사냥감이 될 수 있다. 이미 그런 조짐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는 게 외환시장 전문가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만약 국제투기자금의 원화공격(원화가치 상승을 노린 집중적인 원화매입-달러매도)에 정부가 두 손을 들 경우 한국 외환시장은 큰 충격에 빠지고 정부는 과다한 달러매입에 따른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미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외평채 등 국채의 발행규모가 30조원을 넘어섰다. 여기다 달러 매입으로 시중에 풀려나간 돈을 다시 빨아들이기 위해 찍어낸 통화안정증권도 1백5조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 국채에 들어가는 이자비용은 연 5%로만 계산해도 7조원(60억달러)을 넘는다.

게다가 잇따른 시장개입으로 외환보유액도 적정규모인 3개월치 수입액(약 4백50억달러)의 3배 수준까지 불어나 이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도 늘어나고 있다.

수출이 과연 경기회복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수출의 외화가득률이 63.3%에 불과해 1천원어치 수출할 때 6백33원만 국내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나머지 3백67원은 수입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축적 대응 필요=오석태 씨티그룹 이코노미스트는 "달러 매수만으로 힘에 부친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NDF 규제에 나선 것을 보더라도 정부의 개입정책이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면서 "규제로 가격을 억눌렀을 때 언젠가 일순간에 폭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개입으로 계속 높은 원.달러 환율이 유지될 경우 미국 등으로부터 환율조작국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수희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센터 소장은 "높은 환율이 계속되면 수입 물가상승 압력으로 내년부터 소비가 줄어들고 투자가 억제되는 역효과가 본격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면서 "수출을 살리려다 자칫 내수가 죽어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높게 끌고가면 국내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이 제 실력보다 높게 나타나 장기적으론 허약체질을 자초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가 달러매입을 위해 국채를 계속 발행하면서 금리가 오르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국고채 금리는 5%대에 육박하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모처럼 자리잡은 저금리 기조가 무리한 환율방어 때문에 흔들릴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계속되는 수출호조로 달러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판에 내려가는 원화환율을 억지로 막기는 역부족일 것"이라며 "어느 정도 하락을 용인하며 단계적으로 방어해 기업들이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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