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셋 아성에 도전하는 펀드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호 22면

일러스트=강일구

추수철을 앞둔 가을바람이 상큼하다. 자산운용사들은 올해 ‘대풍(大豊)’을 누렸다. 10년 만에 온다는 용광로 장세를 비료 삼아 34조5000억원을 주식형 펀드로 끌어 모았다. 지난해 말보다 75%나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운용사 곳간마다 풍악이 울린 건 아니다.

10년간, 정통으로, 마라톤을 뛴다

미래에셋이 ‘진공청소기’였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은 전체 증가액의 25%인 8조5000억원을 끌어 모으며 제왕적 지위를 과시했다. 펀드 굴리는 실력이 뛰어난 데다 수년간 입증된 수익률 기록이 투자자의 마음을 샀다.

하지만 시장에선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래에셋으로의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에서다. 미래에셋이 움직이면 증시 지도가 바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1등에 대한 질투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A운용사 임원은 ‘규모의 불경제’를 우려했다. 큰손인 미래에셋이 어떤 주식을 사들이면 주가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수 있으며, 따라 들어오는 다른 운용사들이 생기면서 시장 가격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거꾸로 증시가 대세 하락기로 접어들어 펀드 환매 요구가 늘어날 경우 미래에셋이 팔면 주식이 과도하게 빠지는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B자산운용사 사장은 “미래에셋 펀드로 많은 주식이 편입되면서 대부분 우량기업들의 대주주 리스트에 미래에셋이 오르게 됐다”며 “머지않아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나 은행장이 되려면 미래에셋의 눈치를 봐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미래에셋자산운용 권순학 마케팅본부장은 “올 초 대부분 증시 조정을 예상할 때, 우리는 상승 가능성을 미리 짚고 투자자에게 적극 알려 판매액이 늘었다”며 쏠림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업계의 갖은 우려도 기우(杞憂)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다른 회사가 쓴맛을 봤던 일본·부동산 펀드를 팔 때, 아시아태평양·인프라 펀드 같은 알토란 상품을 소개해 신뢰가 높았다”고 강조했다.

사실 1등을 무조건 욕하거나, 왕좌에서 인위적으로 끌어내릴 순 없다. 무엇보다 ‘투자자 선택’으로 탄생한 1등이 아닌가. 하지만 지나친 쏠림은 1등 회사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을 가져올 위험이 따른다. 과거 현대그룹이 바람몰이를 했던 ‘바이코리아 펀드’의 운명이 그랬다.

그럼에도 해법은 시장 스스로가 찾을 수밖에 없다. 마침 시장에선 미래에셋 아성(牙城)에 도전하는 펀드와 운용사들이 속속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한국밸류 10년투자 펀드=얼마 전 중앙SUNDAY는 자산운용사 사장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펀드에 가입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압도적 1위는 한국밸류자산운용의 ‘10년 투자’펀드였다. 어떤 매력이 있기에 고수들의 집단 러브콜을 받았을까.

펀드 운용 책임자인 이채원 전무를 만났더니 “우리 상품은 ‘재미없는 펀드’”라고 겸손히 말했다. 소심하고, 겁 많고, 방어적인 펀드라는 것이다. 사실 이 전무는 ‘가치투자자’요, ‘장기투자 철학자’로 유명하다. 동원투신 근무 시절인 1999년부터 가치투자 펀드를 만든 선구자다. 그는 “현재 2만원인 주식의 내재가치가 5만원으로 평가됐다면 매입한 뒤 그 가치가 발현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게 바로 가치투자”라고 했다. 이를테면 4~5년 전 건설 업황이 죽을 쒔을 때, GS건설은 투자자들의 관심 밖이었지만 이익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전무는 이런 진주 같은 종목을 골라서 투자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투자원칙에 기대어 올해 ‘10년 투자’펀드는 돌풍을 일으켰다. 5000억원 가까운 자금이 유입됐고, 연초 이후 수익률도 52%로 1000억원 이상 대형 펀드 중 1위에 올랐다. 탄생한 지 1년여 만인 지난달 초엔 순자산(설정액+운용수익)이 1조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무도 “시장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양한 색깔의 펀드가 팔려야 시장을 중화시킨다”고 했다. 특히 그는 “이런 펀드가 있다”고 판매에만 치중하면 안 되며 “이런 구조의 펀드가 있다”며 투자철학을 팔아야 업계·투자자 모두에게 득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내 재산의 10%는 깨져도 상관없다’는 공격적 투자자라면 미래에셋의 성장형 펀드가 적격”이라고 했다.

사실 ‘10년 투자’펀드는 세상의 빛을 못 볼 뻔했다. 3년간 환매를 금지하고 10년을 내다본다는 취지를 설명하자 내부에서 “안 팔린다”며 반발이 심했다. 모회사인 한국금융지주 김남구 부회장이 가치투자 개념과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밀어줬기에 결국 미래에셋 펀드의 좋은 적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전무는 투자자들에게 매수종목을 산 이유를 낱낱이 적은 운용보고서를 보기 드물게 제공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높은 수익률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원래 투자철학으로는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올 2분기 같은 급등 장세는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투자자들에게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KTB 마켓스타 펀드=올해 미래에셋의 독주 속에서 단일 펀드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펀드는 KTB자산운용의 ‘마켓스타’펀드였다. 연초 이후 9000억원이 몰려 설정액 증가 1위에 올랐다. 수익률도 42%였다.

이 회사 장인환 사장은 “테마 펀드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시장 정통형 펀드로 블루칩에 승부를 건 걸 투자자들이 믿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테마투자를 좋아해 운용사들도 마케팅을 위해 그런 펀드를 많이 내놓지만 수익률 제고엔 별로라는 것이다. 그는 약점도 고백했다.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쓰다 보니 매매 회전율이 높아요. 하지만 그게 우리 펀드의 색깔입니다.” 2~3%대의 수수료를 내는 투자자들에겐 그만큼 신경을 곧추세우고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다.

장 사장은 외환위기 와중에 히트를 쳤다 몰락한 ‘바이 코리아’펀드의 운용부장을 지냈다. 그는 미래에셋의 급성장을 어떻게 볼까. “미래에셋은 그동안 트랙레코드(수익률 기록)로 시장에 대답을 했다”며 “자금이 몰린 것도 그 때문이고, 세계 트렌드가 그렇다”고 했다. 다만 “시장의 리더이면 책임의식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올봄 주식형 펀드에서 6조원가량이 환매될 때 미래에셋이 대형주를 팔고 중소형주를 샀다”며 “가격 왜곡을 줄이려면 대형사는 블루칩 중심의 운용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영 마라톤 펀드=신영투신의 ‘마라톤 펀드’도 중소형사 상품으로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5년간 운용하면서 마라톤 뛰듯 꾸준히 시황에 관계없이 제 값을 못 받는 종목을 발굴해 투자했다. 펀드를 책임지는 허남권 상무는 “시간에 대한 투자”라고 했다. 종목 1개 사는 데 6개월이 걸린다. 이런 철학이 평가를 받아 올해 2000억원 가까운 돈이 몰렸고, 수익률도 45%에 이르렀다. 1.5% 수준인 총 수수료도 이 펀드의 장점이다. 일종의 떡고물인 판매수수료가 낮아 은행 등이 권하지 않는데도 고객들이 스스로 요구할 때가 많다. 허 상무는 미래에셋에 대해선 “운용능력을 인정해야 한다”며 “다른 회사가 운용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공동 책임론’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그는 “2005년부턴 주가가 한 방향으로 상승세를 보여 업계 변화의 동인이 약했다”며 “이제부턴 리스크와 수익률을 같이 따지게 되면서 자금 유입도 분산될 것” 으로 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