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국 차세대 지도자 뽑을 17차 당 대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호 07면

2005년 9월 1일 리커창(李克强) 랴오닝성 당서기가 제10회 전중국체육대회 성화를 채화하고 있다. [신화사 본사특약]

‘추쥔’(儲君·황태자).

‘황태자’ 리커창 후계자 수업 시작된다

홍콩 언론이 리커창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최근엔 그가 올 가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뒤 내년 3월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될 것이란 보도도 나온다. 현재 국가 부주석인 권력 서열 5위 쩡칭훙(曾慶紅)을 대신할 것이란 이야기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서 당무를 관장하며, 국가 부주석 신분을 이용해 국제 무대에 데뷔할 것이란 분석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후계자 수업은 없을 것 같다.

리커창은 1955년 7월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리펑산(李奉三)은 50년대 펑양(鳳陽)현 현장을 지냈다. 무식쟁이 현장들이 판을 칠 때지만 리펑산은 제법 학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리커창은 어릴 적 안정된 가정에서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았다. 문화혁명으로 허페이시 제8중학 수업이 중단됐지만, 마을의 국학 대사 리청(李誠)으로부터 고전을 배워 착실한 학문적 기초를 쌓았다. 매일 밤 9시부터 한 시간가량 계속되는 수업을 5년간 받았다.

19세 때인 74년 제8중학을 졸업한 리커창은 펑양현의 한 시골로 내려가 농민이 됐다. ‘농촌으로 가 배우라’ 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물이 맞지 않아 전신 피부병이 생기기도 했으나 열심히 일해 농업 생산량을 높였다. 힘든 육체 노동이 계속됐지만 밤엔 허페이에서 갖고 내려간 책을 보며 공부를 잊지 않았다.

77년 전환점이 마련됐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대학 문을 다시 연 것이다. 리커창은 제1지원 안후이사범학원, 제2지원 베이징대학으로 써 놓고 시험에 응했다. 선지원을 사범학원으로 한 것은 수업료가 공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 선발에서 우선권을 쥔 베이징대학이 그를 먼저 뽑았다. 이듬해 3월 베이징대학 법률학과에 입학한 그는 헌법학자 공샹루이에게서 정치학과 법학을 배우며 여러 권의 법률 도서를 번역했다. 84년에 옮긴 알프레드 데닝의 '정당한 법의 절차'는 호평을 받았다. 88년엔 경제학 석사, 95년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명 경제학자 샤오줘지와 리이닝 등이 은사였다. 91년 리커창이 발표한 논문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는 중국경제학계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을 수상하며 부상으로 8000위안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공부만 했던 건 아니다.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왕쥔타오(王軍濤), 후핑(胡平), 장웨이 등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그는 왕쥔타오의 추천으로 학생회 상무대표위 회장이 돼 학생회 주석인 장웨이와 함께 '베이징대 양대 인물'(北大二傑)로 불리기도 했다. 82년 27명의 우수 졸업생 중 하나로 졸업할 때만 해도 그는 미국 유학을 꿈꿨다. 그러나 베이징대 당부서기 마스장(馬石江)의 수십 차례에 걸친 만류로 학교에 남아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를 맡게 됐다.

83년 초 리커창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특별한 인연 후진타오를 만나게 된다. 후진타오가 상무서기로 있던 공청단 중앙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공청단 분위기는 후야오방이 건설한 평등정신·이상주의가 충만했다. '진타오' '커창'등 서로 이름을 불렀다. 화장실 청소도 돌아가며 했다. 지금도 이들은 사석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리커창은 신인 발굴로 후진타오의 마음을 샀다. 현재 공청단 제1서기인 후춘화(胡春華)가 바로 그다. 83년 베이징대를 졸업한 20세의 후춘화는 티베트 오지 근무를 신청했다. 리커창은 이를 공청단에 보고했고, 단은 후춘화를 '애국 청년'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 공로로 리커창은 28세에 국장급인 공청단 서기처 후보서기가 될 수 있었다. 후진타오가 제1서기가 됐을 때 리커창을 서기로 승진시킨 것은 물론이다. 후진타오는 이후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갔지만 베이징에 올 때마다 리커창을 만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92년 가을 14차 당 대회에서 50세의 젊은 나이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후진타오는 공청단과 노동조합을 맡았는데 이때 첫 번째 한 일이 리커창을 추천해 공청단 제1서기로 만든 것이었다. 93년 38세로 장관급 인물이 된 리커창은 두 가지 업적을 냈다. 하나는 청년봉사활동을 조직해 도시 청년의 농촌 봉사를 지원한 것이다. 둘째는 빈곤 지역에 학교를 세워 주는 희망공정(希望工程). 9000개의 학교를 지어 230만 학생들에게 면학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98년 허난(河南)성 성장으로의 승진은 쉽지 않은 싸움과의 연속이었다. 최연소 성장에 당시 유일한 박사 성장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농업을 위주로 하는 1억 인구의 성을 관리하기엔 벅찼다. 가족과 떨어져 단신 부임한 그는 비서와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애를 썼다. 그러나 2000년 뤄양(洛陽) 대화재로 309명 사망, 2003년 수혈에 의한 에이즈 감염 급증 사건, 2004년 정저우(鄭州) 탄광 가스폭발 사고로 148명 사망 등 잇따른 사고를 만나야 했다. 그가 내세운 '중원(中原) 굴기'전략도 큰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미는 후진타오에게 정치적 부담이 될 정도였으나 후진타오는 2004년 말 그를 동북 최대 공업 지역인 랴오닝(遼寧)성 당서기로 임명한다. 리커창은 부임하자마자 골칫거리인 펑후(棚戶) 지역 정비에 나선다. 펑후 지역은 광부와 그 가족의 임시 거처를 위한 판자촌이었으나 이후 빈민가로 변했다. 리커창은 국가개발은행으로부터 500억 위안을 대출받아 120만 명에게 새 집을 지어 주는 실적을 냈다. 올해 초 후진타오 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권력 1~3위가 모두 이곳을 찾았다. 더디게 성장하더라도 빈민을 챙겨 조화 사회를 이루자는 후 주석의 이념을 구현한 곳이라는 칭찬이 따랐다. 물론 17차 당 대회에서 리커창을 승진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리커창의 강점은 많다. 가장 큰 게 후진타오의 강력한 지지다. 둘째는 그 나이 또래에 리커창만한 학력을 가진 이가 없다는 점이다. 논문상을 받을 정도여서 그저 간판 따는 정도로 학위를 받은 이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평가다. 셋째는 원만한 성격이다.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고, 남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적을 친구로 만드는 재주도 뛰어나다. 리커창에겐 공청단에서 경쟁하던 상대 둘이 있었다. 그가 제1서기로 승진하자 이들은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승진시키고 새 집까지 마련해줘 두 사람을 감격시켰다.

최근 리커창의 행보는 장쩌민(江澤民) 치하의 후진타오를 닮았다. 조신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시간은 그의 편이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