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문화

신선한 접대 책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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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 자신부터 이웃과 지인들을 방문하고 작은 정성이나마 나누는 것을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양 힘들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명절이 몹시 버거운 날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려시대 명문장가 이규보는 ‘술을 보내준 친구에게 사례함(謝友人送酒)’이라는 한시에서 “한동안 우리 집엔 잔술도 바닥이 나, 극심한 술 가뭄에 목이 컬컬 타던 차에 고맙네, 보내준 약주! ‘단비 맛’ 바로 그것일세”라고 호쾌하게 노래했으니, 작은 정성에도 감동하는 우리 민족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외에도 우리 선인들이 지은 시문을 보면 술을 빚어놓고 친구 오기를 청하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자신이 읽은 글 이야기가 나오고, 또 책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이달부터 기업에서 공연이나 전시 입장권, 음반이나 책을 사서 선물하면 세금을 깎아 주는 ‘문화접대비’ 제도가 시행된다. 이는 기업이 총 접대비 지출액 중 문화 분야에 3%를 초과한 접대비를 쓰면 접대비의 약 10%까지 추가 손비를 인정해 주는 제도다. 이를 통해 기업이나 개인이 문화에 대해 좀 더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갖게 된다.

이와 함께 이미 실시에 들어간 이 제도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결국 좋은 제도나 형식도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가 못 하는가에 따라 그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인터넷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중요한 정보 전달원이요, 삶의 보고라고 말한다. 인터넷에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책이야말로 검증되고, 정제된 정보의 보고다.

그런데도 책을 고답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며칠 전 한 백화점의 특별회원들을 위한 공간엘 잠시 들어간 적이 있다. 집의 거실 모양을 흉내 내 아늑하고 편안하게 꾸며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공간 한쪽에 책장이 전시돼 있었는데 실제로 열람 가능한 쉼터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에는 모두 책 모양의 모형 상자들만 전시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책 모양만을, 그 겉멋만을 누리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잠시 휴식하러 오는 공간이니 실제로 책이 꽂혀 있었다면 무료함도 덜고, 또 귀한 정보도 얻어갔을 텐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요즘 책이 너무 흔해져서일까? 책 선물을 왠지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학창 시절 가까운 친구들에게서 받은 문고판형 시집을 늘 침대 한 켠에 두고 뒤적이곤 한다. 이 책들의 앞장을 열면 미숙한 글씨로 적힌 한두 줄의 헌사와 함께 책을 선물로 준 사람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숨이 멎을 듯이 그 옛날의 추억들이 오롯이 생각난다. 그리고 친구의 근황이 궁금해지고 그리워진다. 그 가운데 어떤 친구는 점심까지 굶어 가면서 돈을 모아 그 책을 내게 사 줬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문학을 발견했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당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고, 또 이를 위해 빨리 습득해야 할 정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견 금방 소용에 닿지 않을 듯이 보이는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예컨대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은 꼭 자기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한 권의 책을 꼽고, 그 책을 읽기 전과 그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제는 책 접대에 세제상 혜택까지 준다니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 아닌가. 기업은 고객이나 직원, 또는 관련 인사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책을 받은 이는 그 속에서 기업이 포함돼 있는 넓은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과 고객 상호 간에 뜻 깊은 쌍방향 소통이 완성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