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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눌러쓴 그 애틋함 고이 접어 내 마음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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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소설가 조정래씨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소설가 한무숙씨에게 보낸 편지(下), 화가 오승우씨가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上).

“염치없이 보고픈 나의 정원.…불과 예닐곱 시간에 30여 매를 넘게 원고지의 공간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공로가 아닌가 싶다. 나를 떠나보내던 동대문 네거리에서의 쓸쓸히 보였던 당신의 그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나는 그저 당신에게 고마운 인사를 올려두고 싶다.”

 무뚝뚝하지만 절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 소설가 박범신이 아내인 황정원씨에게 1972년 보낸 연애 편지다. 예쁜 편지지 대신 소설 쓰던 원고지에 적어내려간 그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진실해보인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이 7일부터 22일까지 ‘짧은 글·깊은 사연 문인 편지전-이광수에서 정미경까지’를 연다. 서한문을 통해 문학사를 훑어본다는 취지다. 문인들이 주고받은 엽서·연하장을 비롯 가족편지, 연애편지 260여점이 전시된다.

 김동리, 김주영, 박경리, 박완서, 최인호 등 40여 명의 소설가, 고은, 박두진, 김광균, 신동엽, 신석정 등 80여명의 시인과 시조시인 김상옥,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편지가 두루 포함돼 있다.『25시』를 쓴 루마니아 소설가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영국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 등 외국 문인이 한국 글벗에 보낸 편지도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10살 되던 해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에게 서툰 한글로 적어 보낸 편지도 볼 수 있다.

 이경희 시인이 스승께 보낸 편지에는 사제간의 정이 녹아있다. “선생님 무척 뵙고 싶어요. 서재도 꾸미셔서 문학청년 시절처럼 마구 독서하신다는 얘기를 지난번 소식에서 읽고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김남조 시인은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수험생인 아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아무리 네 형편과 엄마심정이 긴장되고 조급하더라도 때로는 가슴을 확 풀어놓고 음악이라도 좀 듣자. 수증기 같은 도취에 폭 쌓여서 너와 나 마음놓고 행복해 버리고 말자.” 그의 시처럼 낙천적인 세계관이 엿보인다.

 ‘사랑편지 코너’에는 소설가 조정래가 아내 김초혜 시인에게 보낸 연서, 화가 김병종·소설가 정미경씨 부부 사이에 오고간 편지, 한국 여류 화가 정완교씨와 결혼한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디 카푸아씨가 로마에서 보내온 연애편지가 전시돼 눈길을 끈다. 소설가 조흔파씨와 수필가 정명숙씨가 파경을 맞을 무렵인 50년대 중반에 주고받은 편지도 있다.

 가족 편지로는 소설가 손장순씨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애틋하다. 딸을 잃은 아들에게 “너보다 앞서간 윤진은 불효하고 나쁜아이라고 생각하려무나”라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이번 전시회는 2003년 봄 영인문학관에서 열었던 ‘문인 교신전’에 비해 전시작 수가 크게 늘었고, 반세기 전에 오고간 편지부터 2007년 연하장까지 연대의 폭도 넓어졌다. 강인숙 관장은 “김영태 선생이 5년간 손수 정리한 편지를 보내주신 덕분에 전시회는 더욱 풍성해 졌지만 지난달 7월 작고하신 선생은 참석할 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영태 선생이 기증한 편지 작품들이 따로 진열된다. 매주 월요일 휴관. 02-379-3182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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