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미국에 가려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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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15일 82회 생일을 맞은 북한 김일성주석이 16일 미국 CNN방송과의 회견을 통해 미국은 물론,온세계를 상대로 2시간30분동안 말의 성찬을 벌였다.
이날의 회견에서 색다르고 눈에 띄는 말이 있다면 『미국에 가서 낚시·사냥을 하고,친구도 사귀고 싶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 외에는 모두가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으며,개발할 의사도 없다는 천편일률적인 주장들로 일관돼 있다. 핵사찰을 추가로 받을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선 특사교환」의 조건이 철회된 새로운 상황에 따른 전망 등 핵심문제 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한채 미국에 가서 낚시·사냥이나 하고 싶다고 한담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담같이 비쳐지는 말이 만약 김 주석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우리로서도 거부감을 가질 일은 아니다. 그가 미국에 가 그런 취미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현재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혹으로 촉발된 위기가 모두 해소된 뒤에나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그의 미국방문 희망이 진심이라면 그 실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완벽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은 그런 조건에서 북한이 관계개선을 위해 내놓은,이른바 일괄타결 방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미국은 아마 북한이 희망하는 경제협력 방안 등의 논의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그의 미국에서의 낚시 희망은 미국과 수교한 다음에야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거기에는 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북한의 테러리즘·인권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납득할만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 모든 면에서 국제적인 기준과 규칙에 따를 준비가 돼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남북한관계의 발전속도와 단계에 따라 미국은 북한과 관계개선을 조절하기로 돼있다. 따라서 단순히 핵문제뿐 아니라 현재 북한이 일방적으로 사문화시키고 있는 남북한의 기본합의서에 따른 약속을 실현하는 방안도 병행해 가야 미국과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주석의 회견내용으로 봐서는 그렇게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볼 수 없다. 핵무기 개발을 은폐한 시설로 지목받고 있는 장소를 두고 그는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그런 곳은 어느 나라도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사찰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 주석과 북한측은 이 방송회견을 통해 세계를 상대로 상당한 선전효과를 올렸다고 생각할지 모른지만 북한 내부가 아닌 바깥세계가 그런 말잔치에 현혹될 만큼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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