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술] 아프간 인질 사태가 남긴 것 <하> 제3세계와 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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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 초기에 열린 외교부 대책회의장에는 한동안 깊은 침묵만 흘렀다고 한다. 수감자 맞교환을 요구하는 테러 단체에 대응할 마땅한 '외교적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콘크리트 벽에 갇힌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피랍 9일째 되는 날 정부는 이른바 '전문가'를 현지에 파견한다. 한 대학의 아랍어과 교수였다.

2004년 김선일씨 피랍 사건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문성 결핍'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현지 사정과 인맥에 정통한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지 않으면 '외교부의 침묵'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중동을 비롯한 제3세계권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무지 혹은 무시의 정도가 지나친 것이 전문성 부족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국중동학회 장병옥(한국외대 교수) 회장은 "김선일 사건 때처럼 이번에도 초기에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외교의 실종'을 드러냈다"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비교할 때 제3세계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 정도는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중동=석유'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중동협회 한덕규(한국외대 교수) 회장은 "중동지역과 관련해선 정부도 민간도 총체적으로 관심이 적다. 제대로 알려는 노력조차 안 한다. 이래선 안 된다고 수도 없이 얘기해 목이 아플 정도다"라고 꼬집었다.

◆무지와 무시의 변주곡=중동 지역 20개 국가의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현재 외교부에서 아랍어에 능통한 직원은 5명뿐이다. 중동 전역을 제대로 관할하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인원이다. 외교부 측은 현재 11명의 직원이 아랍 현지에서 연수 중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내에서 중동은 대표적인 '냉탕' 지역으로 꼽힌다. 중동에 파견되기를 모두가 꺼리니까 보직 순환 강제 규정이 있을 정도다. 전문 외교관이 양성될 수 없는 구조다.

일본이 중동 외교관의 절반을 아예 전문가로 특채하거나 외교부 내에서 '중동 매니어'를 키우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중동학회에 등록된 전문가는 1000명이다. 반면 한국중동학회에 등록된 학자는 200명. 하지만 실제 활동하는 국내 연구자는 50명 선이다. 한국외대 등 4개 대학의 교수 20명과 강사 30명이 고작이다. 일본 언론의 특파원은 카이로에만 20명이 넘고 중동 전체에는 약 50명에 이른다. 중국의 카이로 특파원도 20명이 넘는다. 아프간 사태 당시 우리의 중동 지역 전체 특파원 수는 4명이었다. 중동 하면 '외교 불모지' '정보 사각지대' 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적 배경이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 보도와 관련, 아사히나 마이니치 등 일본 신문의 정보가 앞서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영태 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는 "이번 사태를 지역 전문가를 제대로 양성하는 계기로 전환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며 "평상시 수요가 없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미래의 위기를 대비하는 시스템 마련 이외의 대책은 없다"고 강조했다.

◆지역 전문가 양성 계기로=국내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네 곳이다. 한국외대와 명지대.조선대.부산외대 등이다. 70년대 기업들의 중동 진출이 한창일 때 중동학 인기가 반짝했다 80년대 이후 시들해졌다. 지금은 아랍어과 학생이라도 2학년 이후엔 취직 준비하느라 영어 공부하기에 바쁘다.

손주영 한국외대 교수(이슬람 역사 전공)는 "한국에서 이슬람 종교뿐만 아니라 중동 관련 모든 것이 터부시되는 현상이 있다"며 "서울대 등 이른바 명문대에서 중동학을 상시적으로 개설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사회 전체가 서구 문화 중심이고, 서구 문화의 배경은 기독교이다 보니 교육 제도 등에서 중동과 이슬람은 뒷전"이라고 아쉬워 했다. 지구촌 시대에 보다 다양한 국제적 채널 구축을 위해서는 제3세계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심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96년부터 5년간 정부가 1000억원을 지원하며 9개 대학에 마련한 국제대학원에서도 중동 등 제3세계 홀대는 예외가 아니다. 중동지역학이 상시 개설된 곳은 한국외대뿐이다. 그나마 이슬람 종교 등 인문학 쪽으로의 접근은 거의 못 하는 실정이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장대련 원장은 "원래 미국에 집중돼 있던 관심이 최근 중국와 일본 쪽으로 쏠리고 있다"며 "중동 지역은 아예 관심 밖"이라고 말했다. 중앙대 국제대학원 양유석 전 원장은 "외교부를 비롯해 사회 전체가 선진국만 선호하는 상황을 개선할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국제대학원 교육만 탓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서강대 국제대학원 이규영 원장은 "중동 지역은 수요가 많지 않다"며 "이런 지역의 연구를 하고 나면 학위를 따도 취업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원장은 "따라서 중동과 같은 제3세계 지역 연구는 관학 협동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 가지 희소식은 10월 22일 인천시에 '한국중동문화원'이 문을 연다는 사실이다. 중동문화원의 운영을 맡을 한국중동협회 한덕규 회장은 "국내에 처음으로 마련되는 중동.이슬람권과의 문화 교류 공간"이라며 "우리 사회의 전반적 서구 편향 속에서 '중동의 시각'이 전해지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태 교수는 "우리 국민, 기업, 정부 모두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미리 보험을 드는 자세로 제3세계권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제3세계권과의 경제.정치.문화적 갈등이 마치 지뢰밭처럼 다가올 수 있다"며 "미래를 위해 제3세계에 투자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 선진국이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배영대.정용환.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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