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집짓기 봉사 다니는 국제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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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서 맛 집 취재를 마치고 ‘공기 좋은 곳에 왔으니 산책이나 해볼까’ 싶어 숲길을 걸을 때였다. 앞에 낑낑대며 통나무를 짊어지고 걷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체력훈련? 그러기에 한 사람은 나이가 많고, 한 사람은 학생이라 뭔가 어색한 조합이다. 호기심 많은 기자, 어찌 이 사연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알아보니 이들의 정체인즉슨, 부자(父子)지간으로 휴일이면 집짓는 봉사에 참가해 이렇게 쉴 새 없이 걸어 다니며 자재를 나르고 공사현장을 누빈다고 한다.
이들 부자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제 좀 선선해지나’ 싶었는데 한낮이 되니 태양은 어김없이 타올랐다. 예열된 대기의 습격을 받아 정신이 다 혼미한 판국에 건축 자재를 나르면서도 연신 웃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노라니 누군가 다가와 안전모를 건네준다. 모자에 새겨진 해비타트(Habitat) 로고를 보고 나서야 감이 잡힌다.
해비타트란, 1976년 민간 기독교 운동 단체에서 시작한 ‘집 지어주기 운동’으로 세계 곳곳의 무주택 서민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 찜통 속에서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투덜대는 기자에게 넌지시 눈짓하는 관리인.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지붕이며 벽이며 사방에 매달려서 집짓기에 열중인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그들 틈에서 정운섭씨 부자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WH 안녕하세요, 아버님? 잠깐 쉬면서 아드님과 집 지어주러 다니게 된 배경 좀 들려주세요.
정운섭(국제변호사, 52세) 아들 녀석이 착해서 아빠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니까 가능한 거죠.(웃음) 주로 봉사활동을 다니는데, 집 짓는 일이야말로 심신 단련에 그만이랄까요.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갖고 있진 않았는데, 변호사 일을 하다보니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유난히 민감하게 됐어요. 특히 사춘기 자녀를 둔 가정에서 불화가 많이 생기는 것을 봤어요. 평소 무심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대화를 시도하려면 어색해서 오히려 갈등이 좀처럼 해소되기 힘들어지죠. 내 아이가 지금은 착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란 법은 없잖아요? 평소에 아들과 함께 운동을 다니며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자식을 대하는 방법을 하나 둘씩 배우게 됐고, 이렇게 의미 있는 작업을 함께 하는 것이 헬스장에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다는 것을 알았죠.

WH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것에 불만을 갖진 않던가요?
정운섭 웬걸요, 녀석이 저보다 더 베테랑입니다. 한 번은 중국으로 해외봉사를 다녀오더니, 그쪽 한의사들의 침술에 감동받은 모양이에요. 그 후로는 한의사가 돼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하더군요. 뭐 대견하고 고맙죠.

WH 앞으로도 계속 집 짓는 일을 열심히 하실 건지요?
정운섭 해비타트 뿐만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아들과 함께 어디든 갈 겁니다. 남을 돕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아들과 함께 땀 흘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니까요. 이것 보세요, 몸도 이렇게 튼튼해졌잖아요? 건강관리가 따로 필요 없으니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일꾼들 속으로 급히 달려가는 정운섭씨. 묵묵히 일하고 있던 아들(정일영 군)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웃는다. 의무적인 봉사활동 점수 때문에 갖가지 편법들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 ‘참 멋진 부자(父子) 한 쌍’을 보았으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분을 살려 관리인에게서 목장갑을 받아들고 공사 현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워크홀릭 기자, 무더운 날씨도 잠시 잊고 집 짓는 부자(父子)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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