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론스타 실속만 챙겨준 '아마추어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결국 외환은행은 론스타의 매각 차익만 불려준 채 외국계인 HSBC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 금융감독당국은 그동안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 전 인수 승인 불가'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국내 은행들이 감독기관의 눈치를 보며 외환은행에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이 HSBC가 3일 기습적으로 론스타와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한 것이다.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은 4일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인수 승인을 내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HSBC가 외환은행을 차지할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재판에서 매각과정의 불법성이 인정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승인 자체를 무효화하지 않는 한 론스타는 계약대로 HSBC에 외환은행 지분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고위 관계자는 "론스타 측 희망대로 이번 계약은 '꽃놀이패'가 아니다"며 "재판 결과에 따라 론스타의 법적 지위가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인수 계약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계약 무산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HSBC와 론스타가 매각 합의라는 초강수를 꺼내든 것은 법률적으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론스타 측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의 유.무효를 따지는 게 아니다"며 "불법성이 인정돼 금감위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직권으로 취소해도 우리는 보유지분을 HSBC에 넘기면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법원이 '외국계 자본을 차별한다'는 해외 언론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2003년 외환은행 인수 자체를 무효화하지는 않을 것이란 배짱이 묻어난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3월 주당 1만5200원에 외환은행 우선협상대상자로 내정됐다. 그 직후 감사원.검찰이 잇따라 외환은행 헐값 매각과정을 조사하면서 일방적으로 론스타가 매각계약을 파기했다. 그 후 1년이 흘렀다. 론스타는 그동안 일부 지분을 매각하고 이번에 HSBC에 주당 1만8045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해 1조4000여억원의 매각차익을 더 챙기게 됐다. 외환은행 인수에 2조1547억원을 투자한 론스타는 4년 만에 5조4000억원의 차익을 거두게 된다. 외국자본의 '먹튀'에 대한 비난이나 공허한 헐값 매각 논란 속에 론스타만 실속을 차린 셈이다.

외환은행이 HSBC로 넘어갈 경우 외환은행 인수를 노렸던 국민.하나은행 등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다. 그동안 헐값 인수를 물고 늘어졌던 외환은행 노조는 무슨 말을 할까. 반(反)외자 정서와 '먹튀' 시비의 눈치를 보며 갈팡질팡해온 정부도 허를 찔렸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외국자본=구세주'라는 헛된 신화에 매몰돼 제일은행.서울은행 등을 싼값에 외국 자본에 넘겨줘 천문학적인 수익을 안겨주었다. 거꾸로 요즘은 역차별, 헐값 매각, 먹튀 같은 선동적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곳에는 시장논리가 자리 잡기 힘들다. 그 결과 지난 1년간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았는지 냉철하게 따져볼 때가 아닌가 싶다.

안혜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