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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정원장이라는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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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고 큰 전쟁을 치러 ‘스파이의 세기’로 불린 20세기는 첩보 활동을 국제관계의 ‘흑색예술’로 간주했다. 적시의 기회 포착과 기만 및 기습공작으로 국익의 최전선을 지키는 데 고도로 전문화된 정보기관만큼 유용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자국의 정보기관을 모두 국가 안보의 최후 보루로 아끼는 이유다.

이렇게 볼 때 2000년 6월 14일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이 귓속말을 나누는 것이 카메라에 잡힌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국의 정보총책이 적국의 수장과 공개리에 밀담을 나눴다는 것은 내용과 관계없이 국제 정보계에서는 경천동지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차에 수행원 없이 편승했다는 것도 정보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후 온갖 억측과 루머를 불러일으킨 이 두 해프닝은 외교가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10월 9일 핵실험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첩보 역량의 총체적 부실은 이같이 기본을 무시한 정보 태만이 쌓여 빚어진 현상이다. 이번 김만복 국정원장이 아프간에서 보여준 행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대내외적 의혹과 비난을 사고 있는 것이다. 피랍자 석방 능력을 발휘하고도 정작 음지화해야 할 ‘흑색예술’을 양지화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국익에 누를 끼친 것이다.

대테러센터를 운영하고 테러관계법 제정을 주도해야 할 기관장으로서 어느 정도 공개 활동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그 동선은 철저히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보안이 생명인 공작 전문 부서장의 언행이 노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지 테닛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근 낸 자서전(『At the Center of the Storm』) 한 권으로 ‘정치적 자살’을 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비밀은 무덤까지’라는 정보맨의 좌우명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물론 국정원이 그간 많은 개혁을 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탈정치화·탈권력화를 제창하면서 산업기밀 보호센터와 국가 사이버 안전센터를 운용해 외부로 유출될 위험에 처한 막대한 국익을 보호한 것은 커다란 성과다. 전통적 대공 전선과 더불어 경제라는 새로운 안보전선을 맡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획기적 구조조정으로 실무부서와 지원부서의 비율을 안배하고 모든 요원의 정예화와 전문화에 심혈을 기울여 온 것도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대선을 코앞에 두고 남북 정상회담을 급조한 것이라든가, 유력 대선 주자를 뒷조사하고 자료를 악용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정상회담의 시기와 의제 및 장소, 모든 측면에서 북측이 주도하게끔 만든 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회담이 될 수 없음을 예고한다. 더욱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 난다”는 상대를 앞에 두고 야당 후보를 음해하려 한다면 이는 일종의 매국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번 아프간 인질 사태를 교훈 삼아 국정원이 문자 그대로 국가 안보의 첨병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