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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열전>6.李鍾贊국방-군의 정치중립 실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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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2년 5월27일 육군참모총장 李鍾贊은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속히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26일의 파병명령 거부와 全軍에 내려보낸「육군훈령」이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고 그래서 어쩌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그는 무장을 해제한채 金宗平정보국장.沈彦俸 헌병사령관등 두명의 참모를 대동하고 대구 육본을 나섰다.
李박사는 당시 자신의 임기만료(52년8월)를 몇달 앞둔 52년5월24일 부산 金井山 무장공비 사건을 조작,이를 빌미로 25일 0시를 기해 영남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부산에 전방 1개 사단병력을 출동시키도록 지시했으나 李鍾 贊 육참총장은「군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신념에 따라 이를끝내 거절했었다.
부산에 도착한 李총장은 밴플리트 주한미군 사령관과 함께 美대사관 승용차를 타고 대통령 임시관저로 갔다.
李총장의 거수경례를 받기가 무섭게 李대통령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귀관은 어찌하여 나라에 반역하고 나한테 반역하는가』라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저희들은 전방을 잘 지킴으로써 각하의 뜻을 보다 잘 받들자는 것이지 각하께서 하시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내가 元容德 장군(당시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게 군대를 부산에 진주시키도록 지시해도 자네가 반대해서 일하기가 어렵다는거야.』 『정치적으로 복잡한 이때 무리하게 군대를 동원할 수는있지만 그럴 경우 군의 정치중립 원칙은 깨지게되고 그런 전례는잘못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李鍾贊의「역사론」에 李박사는 책상를 치면서『60만 대군중에 내 명령을 안듣는 사람은 오직 자네 하나 뿐일세』하며 흥분했다.
육본으로 돌아온 李鍾贊은 파병명령의 부당성을 낱낱이 지적한 자신의 행위가 군최고 통수권자에 대한 不敬으로 비쳐질 경우 신상에 어떤 위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평소 李장군을 좋아했던 밴플리트는 미군헌병들을 총장공관에 파견,삼엄한 경비를 펴는 한편 가급적 공관밖 출입은 삼가도록 신신 당부했다.
그무렵 李박사는 劉載興 육참차장(前국방부장관)에게 직속상관인李鍾贊을 砲殺하도록 명령해 놓고 있었으며 이에 신변위협을 느낀그는 공관 네 방에 이불을 펴놓은채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잠을자기도 했다.
육참총장 시절 부산파병 명령을 거부한 뒤 李대통령의 호출을 받고도 면전에서 장시간 군의 중립성을 옹호하며 설전을 벌였던 52년 이 일화는「군인 李鍾贊」의 참모습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한일합방 6년째인 1916년3월 서울합정동 옛 서대문구청 자리에 있던 99칸 짜리 집에서 舊韓末 법부대신을 지낸 李夏榮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일본육사(49기.공병)를 나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46년귀국,日軍從事를 수치로 여긴 나머지 3년간이나 방랑생활을 보냈던 그는 동기생인 蔡秉德(前육참총장,6.25당시 河東전투戰死)등의 간곡한 권유로 49년 대령으로 임관,육본 제1국장겸 정훈국장을 맡으면서부터 국군에 합류했다.
군의 정신적 지주요 代父로 통했던 그는 60년 朴正熙장군과 더불어 3.15부정선거를 노골적으로 반대한 군내 단 두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5.16후에는 朴正熙 대통령의 수차에 걸친 제의를 뿌리치고 끝끝내 국영기업체 장은 맡지않 았다.
육참총장 시절 사촌동생의 진급을 일부러 누락시켰으며 국방장관때는 쿠데타 모의를 감지,朴正熙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의 光州 1관구사령관 좌천을 묵인했다.10.26직전 維政會 부의장시절에는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제명을 유일하게 반대하기 도 했다.
그를 얘기할 때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것중의 하나는 그가 朴正熙.金載圭(前중앙정보부장,10.26사태 직후 처형)등과 숙명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는 점이다.
57년 8월 어느날 3사단 부사단장 金載圭 대령은 宋堯讚 1軍사령관에게 부대현황을 브리핑하던중『1軍 산하에 이렇게 무능한장교가 있느냐.24시간내 보따리 싸고 군을 떠나라』는 모욕적인질책을 받고는 곧바로 육대총장으로 있던 李鍾贊 중장에게 달려가『차제에 군복을 벗겠다』며 말했다.
사정을 들은 李총장은『宋장군만을 위해 군생활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예편을 만류한뒤 오갈데 없는 그에게 직제에도 없는「학생감독관」이라는 직책을 마련해 줬다.
李장군과의 근무인연은 이때가 세번째로 金載圭는 그밑에서 준장으로 진급(59년),부총장직에 오르기까지 모두 6년동안을 보필하면서 養父로 부를 만큼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52년 어느날 李鍾贊은 특무대가 조작한 어떤 사건과 관련,金昌龍 특무대장에게『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며 면전에서 호통을 쳤다. 金載圭가 10.26 당일 車智澈을 향해 권총을 쏘면서『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한 것은 바로 다름아닌 李鍾贊이평소 잘쓰던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해 내뱉은 말이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金載圭는 그를 국방부장관으로 적극 추천했지만 3선개헌을 앞둔 朴대통령은 그가 장관이 될 경우 혹시 국무회의에서 개헌안에 반대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李鍾贊과 朴正熙의 인연은 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李장군이 육참총장직에서 전격 해임돼 自意半 他意半으로 美참모대학 유학길에 오르던 52년 8월17일 공항.비행기의 트랩을 향해 돌아서려는 순간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한 대령이 다부진 걸음으로 바짝 다가와 거수경례를 하고는 하 얀 봉투를 건네준 뒤 귀엣말로『이륙한 다음 뜯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부산 정치파동 등으로 민심은 이미 李정권을 떠났으며 총장(李鍾贊)께서 나라를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었다.
(중략)차라리 지난번에 구국을 위한 행동을 단행할 걸 잘못한 것 같다.』 편지에는 구구절절 지난 부산정치파동때 결정적 거사시기를 놓친데 대한 후회가 담겨있었다.李鍾贊이 朴正熙의 쿠데타의지를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朴正熙.李鍾贊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육사를 나와 정의감이 강하고 청렴강직하며 음악에 조예가 깊고 인정에 약했으며『황성옛터』를 즐겨부르는등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다만 한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면 군인으로서 정치를 보는 시각이 서로 대조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許政 과도정부하에서 불과 석달남짓(60년5월2~8월19일)한 짧은기간 국방장관직을 맡았었다.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군부가 한창 들끓고 있을 무렵 朴正熙 군수기지사령관의 整軍論을 듣고 쿠데타를 예견한 그는 군의 정치간여를 예방하기 위해 美國의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같은 기구를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석달남짓 短命그쳐 朴장군의 쿠데타 음모에 쐐기를 박기위한 사전조치였다.
이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등 군수뇌부로 하여금 제헌절날 헌법준수 선서식을 갖도록 지시했다.
그해 6월27일자『이코노미스트』誌는『한국정국은 아직 혼돈하나군부의 쿠데타 가능성만은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관직을 사임한 그는▲駐이탈리아 대사▲코리아 엔지니어링 사장▲한국후지필름 회장▲9대 유정회 국회의원▲星友會長등을 역임했다.
35세의 늦은 나이(육참총장 시절)에 서울의 한 그릴에서 일하던 10년 연하의 表滋永씨(91년 작고)와 만나 부모들의 결사반대를 뿌리치고 연애결혼 한 그는 평생동안 한점 혈육을 두지못했지만 부부간의 금실은 죽는날까지 남의 부러움 을 살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몇시간씩 담화를 나누는 다변가였다.
육대총장 시절에는 장교들이 진급신고나 보고를 하러가기 전 아예 화장실을 다녀와야 할 정도였다고 당시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張奉天씨(70.예비역 육군소장)는 말했다.
〈金埈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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