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극작가 윤영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호 10면

참으로 조용하게 왔다가 말없이 그가 갔다. 윤영선 선생.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2000)의 끝 대사들은 그의 죽음을 예견한 듯하다.
“난 이제 아침이 돼도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에 눈부셔 하지도 않고 자명종 소리에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브람스의 음악도 슈베르트의 음악도 듣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안녕이라고 말도 못하고”.
이 희곡은 “죽어가는 살과 세포와 부패하는 내장과 삐걱거리는 뼈와 함께… 나는 일어나네. 죽음을 저만치 밀쳐내고 나는 가야 할 곳을 향해. 나는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 거지? 닳아빠진 내 신발을 끌고”라는 대사로 끝난다.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그가 이미 오래전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통을 피하려 서둘러 죽음의 자리로 들어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그가 “정체 모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희곡집 서문) 숨을 쉬고 살았던가? 그는 “말하고 싶어도 말 못”했고, “듣고 싶어도 못 들”었다. 반대로 그는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기억하려고” 글을 썼다. 그러고도 답답해서 하는 말이 “내 글들이 그 많은 샛길을 찾아 달아날 수 있었으면”이다. 그는 삶의 공포에 대한 내밀한 글쓰기를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의 인물들은 희곡 제목인 ‘사팔뜨기’처럼 곁눈질하는 이들이다. 작품 속에는 공포와 불안의 시선, 즉 죽어가는 시선을 지닌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류에서 벗어나 자유로웠던 작가
극작가 윤영선은 연극계 주류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자유·불복종 같은 단어가 삶을 정의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낱말이라면, 그에게 주고 싶다. “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 문을 열고 나가면 정글이야”(‘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에서)라고 말하는 그는 주류로부터 떨어진 덕분에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그는 희곡을 쓰면서 자신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가 쓴 희곡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자신이 기거하고, 자기 자신과 대화했던 내면의 집이었다. 이 공간에서 세상의 소리는 소멸되고 자급자족의 언어가 생출된다. 그것은 “상처 난 기억, 망가져버린 시간, 봉인된 비명”의 언어다. 살아있는 동안 그는 “절망과 희망을 뒤섞으며…죽음을 저만치 밀쳐내고”, “무엇인가를 움켜쥐려 했”고, “무엇인가를 보려고” 했고, “무엇인가를 들으려” 했고, “뭔가를 먹으려,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고, “어디론가 가려고” 했었다. 그것은 그가 삶의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 작품을 쓰고 연출했던 이유가 된다.

윤영선은 2001년에 유일한 희곡집 『윤영선 희곡집 1』(평민사)을 출간했다. 이 희곡집에는 ‘미생자’(2004), ‘여행’(2005), ‘임차인’(2006) 이전의 작품들이 고스란히 줄 서 있다. 열거하면 ‘사팔뜨기 선문답-난 나를 모르는데 왜 넌 너를 아니’(1994),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1996), ‘맨하탄 일번지’(1997), ‘키스’(1997), ‘G코드의 탈출’(1998), ‘내 뱃속에 든 생쥐’(1998), ‘파티’(1998),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2000) 등이다. 윤영선에게 연출은 멀리 있었고, 희곡은 가까이 있었다. 그에게 연출은 오래전에 했던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다면, 희곡 쓰기는 기억을 유지해주는 거주지와 같았다. 첫 작품인 ‘사팔뜨기 선문답’은 작가 자신의 “내면 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으로, 인물들은 “작가의 내면 속에 억눌려 있던 목소리”들이다. ‘떠벌이 우리 아버지…’에 이르러서 내 목소리는 햄릿과 오레스테스의 목소리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거트루드와 클리타이메스트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선왕 햄릿과 아가멤논, 누나의 목소리는 오필리아와 엘렉트라 그리고 카산드라의 목소리로 합쳐져 분출된다. 이 작품은 세계가 존재하는 한, 인물들은 필연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이미 그의 “몸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존재의 외로움 벗어나려던 ‘키스’
윤영선의 대표적 희곡은 ‘키스’, ‘파티’, ‘나무는…’ 등이다. 한결같이 희곡의 전후 맥락을 예측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사랑과 시간에 관한 언어들이 하찮은 것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그 절정은 ‘키스’가 될 것이다. 윤영선은 존재의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키스라고 말한다. 키스에는 고통과 폭력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의 키스는 열정적이지 않고 스산하다. 텅 빈 무대에 선 남녀 배우는 키스가 아니라 말들을 내뱉는다. 이 인물들은 제 몸이 사로잡혔던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키스는 두려움이자 즐거움이다. 불안하게 떠도는 말들은 키스하고 싶은 두 몸을 위로한다. 그는 망각도 기억도 아닌 키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키스에 이르기 위하여 말들을 희생한다. 그것이 애처롭다.

‘여행’(2005)은 여러 면에서 그의 삶과 조우한다. 윤영선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러 떠날 준비를 한 것 같다. 이 작품에 나오는 친구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죽음이기도 했으며, 죽음이 가져다주는 상실감은 살아있던 윤영선이 겪어야 했던 불안이기도 했다. 이 작품 이전에 평론가들은 윤영선의 연극을 관념적 연극,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연극으로 요약했다. ‘여행’은 윤영선이 관념적 세계에서 일상의 삶으로 주거지를 옮긴 작품이지만, 새로 옮긴 주거지에서의 삶은 너무나 부박했다. 그는 첫 희곡에서부터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는 불안 속에 있었다. “어느 틈엔가 뒤틀린 장판지처럼 눅눅하게 녹아내린 하오의 햇빛 속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했다. “아직 지우지 못한 아픔으로 거기 누가 한숨 쉬고 있느냐”(‘사팔뜨기 선문답…’)라고 자기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그래 나는 한 죽음을 보았지”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삶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여행을 해야 했던 셈이다. 삶에서 내쫓기며 죽음으로 들어가 있었던 그때부터 그는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고, 위로 펄쩍 뛰고 소리지르고 신문을 찢어서 집어던지”는 “광란적인 태도”를 지닌 이들이다. 그 끝자리에서 윤영선은 다시 말한다. “아직도 희망이 있는 걸까? 어서 빨리 늙어서 죽어버렸으면”이라고.

좋은 벗을 그리워한 외로운 인간
무엇보다도 그는 좋은 벗들을 만나서 살고 싶었다. 사는 동안 자신을 “떨리게 해주었고, 피폐해진 가슴에 작은 불씨를 살려낸 눈빛을” 지닌 이들을 잊지 않으려 했고, 그들이 준 “따스한 말들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벗은 “산속에 홀로 있을 때 흐느끼지 않도록 도와준 나무와 풀들”이고, “옥수수대를 넘어뜨렸던 바람”이었고, “밤 마당을 환한 꽃으로 장식해준 배나무”였고, “밤하늘 위에 떠 있었던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 풀벌레들”이었다. 그는 사는 동안 “빈 하늘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우는 기러기”와 같았다. 그는 그렇게 외롭게 살다 갔다.
윤영선 선생의 부음을 들은 많은 이웃은 모두가 한 대 맞은 것 같다고 했다. 한 이웃은 “그를 잃은 허망함, 그동안 그에게 소홀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의 부음을 듣고, 나는 말러가 뤼케르트의 시에다 곡을 붙인, 숭고하고 눈물겨운 이별사인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를 줄곧 들었다. 그 역시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떠들썩한 세상의 동요로부터 죽었고, 고요의 나라 안에서 평화를 누리네. 나의 하늘 안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오. 내 사랑의 품에서, 내 노래의 품에서…”라고.

__________
LIFE STORY
----------
‘키스’와 ‘여행’ 사이에서
윤영선은 1954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단국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미국 뉴욕주립대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귀국한 뒤 94년 희곡 ‘사팔뜨기 선문답-난 나를 모르는데 왜 넌 너를 아니’를 발표·연출하며 국내 연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프로젝트 그룹 파티’와 함께한 ‘키스’로부터 ‘여행’에 이르기까지 그는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와 관계를 파고든 작품을 썼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로 일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키스(1997)
남과 여의 떠도는 말 속에서 인간의 존재와 관계를 파고든 3부작. 초연 당시 1부 윤영선, 2부 박상현, 3부 이성렬 세 명의 연출가가 무대를 만들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라는 대사의 반복과 변주로 사랑의 외로움을 드러냈다.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97 올해의 연극베스트 3’ 수상작.

여행(2005)
초등학교 동창의 죽음으로 오랜만에 모인 40대 후반 중년 남성 몇이 장례식에 다녀오는 하룻밤 여행을 그린 작품. 문상을 가러 기차에 오른 친구들은 이런저런 갈등으로 서로 겉도는 신세가 된다. 흔히 관념적이라 분류되던 작가의 희곡세계가 현실로 눈길로 돌린 지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______
안치운씨는 『추송웅 연구』『연극제도와 연극읽기』등을 펴낸 연극평론가로 산문집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길과 집과 사람 사이』를 썼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