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가 더 따뜻하게 들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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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31면

브람스의 음악이 가슴으로 다가온다면 가을이다. 교항곡 4번이나 바이올린 소나타의 선율에서 선선한 바람의 감촉과 묵직한 서정을 교감한다. 좋아했던 사람과 들었던 브람스의 추억은 거칠해진 CD 케이스의 흠집으로 박혀 있다. 이젠 홀로 브람스를 듣는다. 사람은 가고 음악을 들려주는 진공관의 반짝이는 불빛만 아련하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아리에타’ 진공관 앰프

삼십 년 이상 오디오 기기와 함께 뒹굴며 살았다. 온갖 기기의 섭렵은 필수과정이다. 과거의 빈티지 기기에서부터 첨단의 하이엔드 오디오까지. 취향과 선택은 돌고 도는 법이다. 남들이 고물로 취급하는 진공관 앰프와 내 나이보다 많은 탄노이 오토그래프 스피커가 현재의 시스템이다.

정착은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매력적인 오디오 기기는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을 빼앗긴 진공관 앰프 ‘아리에타(arietta)’가 있다. 여기엔 첨단 반도체의 원형이라 할 초기 3극진공관인 2A3가 들어 있다. 미국 RCA사에서 만든 2A3는 전설의 명관으로 불린다. 디지털 전성시대에 외려 주목하게 된 초기 진공관의 매혹적 음색은 많은 음악애호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아리에타’는 호주의 ‘멜로디’란 소규모 진공관 앰프 회사 제품이다. 과거의 명관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과 기품 있는 자태로 ‘아리에타’는 일약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첨단 과학을 마다하고 과거의 소자와 수법으로 만든 진공관 앰프의 성공은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는 원전 악기로 연주하는 클래식계의 고음악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핵심은 한계에 다다른 시도의 벽을 깨려는 도전이다. 순수로의 회귀와 열망은 원형의 재발견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아리에타’ 역시 가장 순수한 음을 내주는 과거의 명관에서 좋은 음을 이끌어냈다. 막힐 때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인간이 오랜 세월 체득한 지혜의 실천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신기의 연주를 얻은 ‘파가니니’의 전설은 현실로 바뀌었다. ‘아리에타’는 최고의 부품들을 일일이 손으로 배선한다. 여기에 여러 번의 칠을 입혀 굳힌 매끄러운 앰프의 외형은 시간과 효율을 무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만듦새는 음악가의 정신과 통한다. 결국 좋은 음이란 악마에게 모든 것을 바친 광기의 소산이 아닐까. 아름다움의 유혹은 언제나 처절함과 맞닿아 있다.

이상의 화음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해보았던 ‘미친놈’의 순수는 열정을 더해 ‘아리에타’로 완결되었다. 난 ‘아리에타’가 풍기는 마력에 빠져 있다. 신비한 바이올린의 음색과 농밀한 육성의 실재감, 들려주는 음악은 싱싱한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벌겋게 달아오른 진공관이 내뿜는 따스한 불빛은 앰프란 악기의 숨결이기도 하다.
음악과 함께한 추억의 잔해들로 가득한 삶, 쓸데없는 에너지의 낭비는 아닐지 모른다. 오랜 시간 브람스를 듣고 또 들었다. 가을 병이 도지는 모양이다. 올해의 병세는 다 ‘아리에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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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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