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이 남긴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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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18면

고난의 시간이었다. 주가지수 2000 근처에서 펀드에 가입했거나 주식을 사들였던 투자자들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뒤 하늘은 더욱 청명해진다고 했던가. 시장은 언제 큰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순항 중이다.

서브프라임(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는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외풍이었다. 투자자들은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을 타면서 자산을 불린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절감했다.

하지만 아픔이 컸던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먼저 국내 투자가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이는 곧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敬畏心)의 극복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증시의 주도권은 외국인들이 쥐고 있었다. 그들의 행보는 투자의 정석으로 통했고, 개인 투자자들은 외국인 따라 하기에 열중했다. 실탄이 부족했던 국내 기관투자가는 시장에 큰일이 벌어져도 ‘강 건너 불구경’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하루 1조원씩 쏟아진 외국인 매물을 국내 기관이 거뜬히 받아냈고, 주가를 이내 상승흐름으로 돌려놓았다. 외국인들은 겁에 질린 듯 주식을 투매했다. 거기서 선진금융의 관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인 투자자들은 이제 국내 기관의 행보를 더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서브프라임 회오리 속에서도 증시로의 자금 유입은 멈추지 않았다. 주식형펀드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고, 적립식 펀드 계좌 수는 1000만 개를 돌파했다.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일반의 신뢰가 계속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국내 상장기업들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기업들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며 큰 수익을 남겨 주주들의 호주머니를 불려줄 것이란 기대가 그것이다. 국내 주가를 앞으로 10배로 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업들이 장사를 잘해 주당순이익을 10배로 늘리면 된다. 그러면 주가가 10배로 올라도 주가수익비율(PER)은 같은 수준을 유지한다.

미국 증시가 그랬다. 1980년대 후반 1000대였던 다우지수가 20년에 걸쳐 1만3000대에 이르기까지 PER은 15∼18배 수준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는 ‘주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역시 실적’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줬다. 국내 기관이 주가 급락에 과감히 맞설 수 있었던 것도 12배 선으로 좋아진 PER 덕분이었다.

개인 투자자들도 나름의 교훈을 얻었다. 빚을 내 주식 사는 것의 위험을 절감한 것이다. 신용융자로 주식을 샀던 투자자들은 주가 급락으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허둥지둥 주식을 처분해야 했다. 일부 투자자는 투자원금을 몽땅 날리고 ‘깡통계좌’를 차기도 했다. 빚을 내 투자하면 장세가 급변할 때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주식투자는 여유자금으로 길게 보고 해야 성공한다는 사실을 서브프라임 사태는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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