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종욱 WHO 사무총장 부인 가부라키 여사 인터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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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12면

신동연 기자

“1972년 대학 석사과정(영문학)을 마치고 한국에 왔어요. 안양시 나자로마을 한센병 수용소에서 환자를 간호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의 고아원에서 일하다가 건너왔지요. 그러다가 76년 역시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남편을 만났어요. 돈을 한 푼도 안 받고 이런 데서 일하는 의대생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총장은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열 달 만에 결혼했다. 봉사활동이 맺어준 연분이었다. “한국에 올 때는 ‘감사합니다’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그 나라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으면 그 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게 됐지요. 처음에는 ‘배고프다’‘골치 아프다’‘설거지합시다’ 정도만 알았습니다.” 한국어 공부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성경책이었다. 한국어 성경책을 보고 이해가 안 되면 일본어 성경책과 대조해 가면서 단어를 익혔다고 한다. 가정에서의 공식어는 자연스레 한국어가 됐다.

“난 늘 망설였는데 남편은 한평생 하면 된다고 말해”

결혼 후에는 대한해협을 들락거려야 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배우자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이 총장도 미국 유학을 원해 두 사람은 79년 이래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이 총장은 81년 하와이대에서 보건학 박사를 받았고, 사모아 병원 의사를 거쳐 83년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을 맡으면서 WHO와 인연을 맺었다. 가부라키 여사가 이후 한국에 들른 것은 이번이 세 번째. “한국을 떠나 10년 후쯤에 남편과 함께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오래 있을 데가 없다 보니 오질 못했어요. 지난해 남편이 돌아가신 다음에 20년 만에 왔지요. 한국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 너무 마음이 좋아요.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친절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요. 특히 결혼 당시에는 남존여비가 강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굉장히 어려웠어요. 한국을 떠날 때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어요.”

가부라키 여사에게 이 총장은 자상한 남편이자 집념의 인물이었다. “남편은 뭐든지 준비해 주었어요. 여러 나라를 옮겨 다녔는데 제가 출국이 늦어지면 (이사 등을) 다 끝내놓고 오라고 했어요. WHO 가기 전까지는 그냥 의사로만 봤는데 WHO 가서는 대단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WHO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는 여러 문제가 생겨서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잘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아내로서 남편에게 ‘당신 잘한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요.”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지난달 29일 대전 국립현충원의 남편 묘소를 찾아 묘비를 지켜보고 있다.

이 총장의 지론에 대해선 적극적 사고를 꼽았다. 자신은 늘 ‘이것을 할 수 있을까. 못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데 비해 이 총장은 정반대였다고 했다. “그 사람은 ‘이것 할 수 있을까. 해봐야지’ 그런 식이었어요. 뭐가 잘못되면 ‘괜찮아,괜찮아’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영어판 전기 출판을 도와주고 있는데, 한 장(章)으로 ‘괜찮아(It’s all right), 괜찮아’를 썼어요. 항상 안 될 것 같은 생각은 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으로 그 사람은 살아왔어요.”

이 총장 영어판 전기는 영국인 학자 데즈먼드 에이브리씨가 준비하고 있다. 이 총장과 20년 넘게 안 사람으로 총장 재임 때 연설문 담당이었다. “제가 에이브리씨 집에 가서 남편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현재 몇 백 페이지를 썼다고 합니다. 저도 12~13장(章)을 써서 보내주었어요. 에이브리씨는 한국에 와서 남편 친구와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자금문제 등으로 잘 안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학자인 만큼 자기 연구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WHO에서는 ‘이종욱 기념상’ 첫 수상자가 나오는 2009년에 전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에이브리씨는 2010년을 출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오래되면 사람들이 잊어버리니 전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이 총장에 관한 국내 서적은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하라』(가야북스)가 있다.]

가부라키 여사는 현재 페루 수도 리마에서 지내고 있다. 그곳에서 활동하는 봉사단체에 소속돼 여자들에게 뜨개질과 자수를 가르치고, 물품판매를 알선한다. 이곳에 가게 된 것은 이 총장 때문이었다. “남편은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도와야 한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제네바에서 할 일 없이 심심해하니까 남편이 페루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했어요. 항상 제가 하는 길을 찾아주었지요.”

가부라키 여사가 리마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2년 1월. 이후 이 총장이 타계할 때까지 이곳과 제네바를 왔다갔다했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든 물품은 제네바 WHO본부의 바자, 일본 여자대학 축제, 미국 하버드대 NGO 사무실을 통해 팔고 있다. “페루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니 물품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팔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제네바 바자는 1년에 한 번 하는데 WHO가 계속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판로가 문제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물품을 팔겠다는 분이 없어요.” 그는 “현지 여성들이 스스로 계획을 짜 만들고 파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지만 아직 그런 상태가 아니다”며 “리마에서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인 이충호(30)씨는 현재 미 콘웰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가부라키 여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저와 거의 매일 통화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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