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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날 보고 웃는 너희가 더 웃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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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무려 1천편 가까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곳, 그래서 물량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제치는 나라가 인도다. 이제는 뭄바이로 이름이 바뀐 도시 봄베이와 할리우드를 결합한 볼리우드(Bollywood)는 화려한 춤과 노래가 장기인 인도의 대중영화산업을 일컫는 말로 쓰인 지 오래다.

자국민에게는 이처럼 사랑받는 인도영화지만 과장된 연기, 권선징악의 천편일률적 결말, 키스신 한번 없는 로맨스는 이들을 주로 '내수용'에만 머물게 했다. 한국시장에서도 마찬가지. 2000년에 처음 소개된 볼리우드 뮤지컬 '춤추는 무뚜'가 얻은 반응은 인스턴트 카레 맛에는 익숙해도 정작 인도의 토착향료 마살라에는 당혹스러워하는 우리네 입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식 향료를 가미한 서양의 퓨전요리라면 어떨까. '러브 액추얼리'같은 로맨틱 코미디로 이름난 영국제작사 워킹타이틀이 할리우드와 손잡고 만든'구루'가 그런 경우다.

볼리우드를 흉내낸 흥겨운 뮤지컬 장면, 여기에 인도에 대한 미국인의 편견을 웃음거리로 처리한 빼어난 각본이 더해져 1시간30여분 동안 부담없는 오락을 선사한다.

어린 시절 남들이 다 볼리우드 뮤지컬에 울고 웃는 사이 극장을 빠져나와 존 트래볼타의 '그리스'를 훔쳐볼 만큼 주인공 라무(지미 미스트리)는 할리우드를 동경해왔다.

드디어 인도에서의 춤선생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는데, 막상 뉴욕에 도착해보니 벤츠를 몰고 펜트하우스에 산다던 고향친구들은 인도식당 웨이터나 택시기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다. 그들의 재치있는 대사를 빌리면 "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메리칸 드림"이란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라무는 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영화사를 찾아가는데, 실은 싸구려 포르노를 찍는 곳이다.

첫 촬영에서 쩔쩔매는 라무에게 상대 여배우 샤로나(헤더 그레이엄)는 요긴한 도움말을 준다.

우연히 인도 출신의 구루(guru), 즉 정신적 지도자의 대역을 하게 된 라무는 샤로나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성적인 문제 해결의 도움말로 써먹어 부잣집 딸 렉시(마리사 토메이)를 사로잡고, 뉴욕 상류사회의 명사로 떠오른다.

'구루'의 재미는 이처럼 같은 말을 달리 해석하는 이중적인 상황에서 나온다. 오디션을 보러 간 라무는 성기를 가리키는 미국 속어를 잘못 알아들어 마카레나 춤솜씨만 맹렬히 선보이고, 상류층 뉴요커들은 포르노 배우의 단상을 성에 대한 해방론으로 받아들여 열광한다. 물론 희화화의 초점은 영적인 가르침을 성적인 지침과 동일시하는 뉴욕 부자들의 허위의식에 맞춰져 있다.

파티장의 인도인이라면 으레 시중 들러온 사람으로 여기던 미국인들이 구루로 변신한 라무의 추임새에 따라 볼리우드식 군무를 추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가무의 즐거움을 넘어서는 쾌감을 준다. '부기나이트'에서도 포르노 배우로 등장했던 헤더 그레이엄과 영국 태생의 인도계 배우 지미 미스트리는 순진한 표정으로 무장한 채 낯 뜨거울 법한 장면을 하나도 낯 뜨겁지 않은 코미디로 만드는 재주를 발휘한다. 마리사 토메이 역시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가며 천연덕스런 코미디를 보여준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은 '뻔할 뻔 자'이지만, 이런 할리우드식 화법 덕에 이 퓨전요리는 더욱 소화하기가 쉽다.

세계 뮤지컬 시장의 '큰 손'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볼리우드를 무대로 한 '봄베이 드림스'를 만든 것처럼, 볼리우드산 향료를 탐내는 서양 문화계의 식욕은 이제 보는 이도 구미를 당기게 하는 수준까지 온 듯하다. '파티 걸'로 데뷔한 미국 감독 데이지 메이어 연출. 30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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