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산책 (49) 눈 시원하고 걷기 좋은 베를린 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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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도시에는 눈에 보이는 선(線)도 있고 보이지 않는 선도 있습니다. 보이는 선을 긋는 것은 공공의 질서를 위해 적극적으로 경계를 시각화하는 일입니다. 그 예로 화장실이나 은행의 현금인출기 앞에 그려진 대기선, 주차장의 구획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법률에 의해 규정돼 있는 선도 있습니다. 토지의 소유 관계를 구분하는 대지 경계선이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간적 범위를 정한 건축한계선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설정된 경계를 무시하고 공간을 침범하는 사례를 흔히 봅니다. 주차구획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공간에 걸쳐 주차하는 바람에 다른 차가 주차할 수 없게 합니다. 일정한 공간 내에서만 영업이 허가된 노점상이 규정된 면적과 경계를 넘어 물건을 펼쳐놓아 가로 환경을 어지럽히고 시민의 보행권을 침해합니다(1). 이러한 현상은 모든 점포에 연쇄 반응적으로 일어나 결국 불법이 보편화된 거리가 됩니다.

선진 도시는 '선의 도시'라 할 만큼 선과 경계가 명료합니다. 파리의 경우 노점상 허가구역에 보이는 선을 적용해 적극적으로 규제합니다. 상인들은 보도 바닥에 그어진 경계선을 철저히 지킵니다(2). 구획선의 수직면 밖으로 상품이 돌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쾌적하고 장애 없는 보행환경을 확보합니다.

도시경관의 질서를 이루는 건축선도 형식적인 기준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률상으로는 건축물에 부속된 어떠한 요소도 건축선의 수직면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옥외간판과 불법 시설물이 경계면을 넘어 무질서하게 돌출돼 경관을 어지럽힙니다(3). 베를린의 한 가로는 시각을 방해하는 돌출 요소가 없어 질서 있는 경관을 이루는 한편, 도심 속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또 법률상의 경계인 건축선을 준수해 연립한 여러 건물이 미끈한 면을 이루도록 합니다(4).

도시의 선과 경계를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공간의 공공성과 경관 질서를 확립하는 일입니다. 선진 도시는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권영걸 교수·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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