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볼 (16) '기계다리' 북한 허죽산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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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북한에서 2001년에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은 펠레.야신 등 8명의 전설적 축구 영웅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선수가 '기계다리'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떨친 허죽산이다.

1924년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허죽산은 차별과 학정을 일삼는 일본인을 혼내주려고 축구에 매진한다. 맨발로 짚풀공을 수없이 차면서 기술을 익힌 그의 발등은 피멍으로 성할 날이 없었다. 정교한 왼발 휘둘러차넣기(발리슛)로 기계다리라는 별명을 얻은 허죽산(사진)을 일제는 일본 대표팀에 뽑으려 했다. 이를 거부하자 곧바로 징용명령서가 날아왔고, 고향을 떠난 허죽산은 해방 뒤 돌아온다. 조선인민군 해군 중위로 복무하며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해 명성을 날린 허죽산은 한국전쟁 중이던 50년 9월 11일 철령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기계다리의 후예들'이 남쪽으로 와서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월드컵에 출전했다. 북한은 예선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에 0-1로 끌려가다 후반 종료 직전 임철민이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브라질과의 2차전에서도 전반 7분까지 3골을 먹고도 한 골을 따라갔고, 근성 있는 플레이로 상대를 물고 늘어졌다. 약체인 뉴질랜드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북한은 맹공을 퍼부었지만 골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였고, 후반 10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넣었다. 북한은 '죽음의 조'에서 당당히 16강에 진출했다.

북한에는 연중 리그를 펼치는 13개 클럽이 있다. 이들은 축구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전국에서 찾아낸다. 클럽에 뽑힌 유소년 선수들은 별도의 교육 과정을 거치며 전문 축구선수로 키워진다. 북한의 연령별 유소년 대표팀은 중국 쿤밍에 있는 홍타 스포츠센터에서 거의 1년 내내 합숙 훈련을 한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전폭적 지원 아래 훈련에 매진하니 기량이 쑥쑥 클 수밖에 없다. 북한팀 단장을 맡은 김경성(남북체육교류협회 상임위원장)씨는 "주장 안일범과 이번 대회 두 골을 넣은 임철민은 유럽 프로팀에 진출할 수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어땠나. 예선 2패를 당한 뒤 무조건 크게 이겨야 와일드카드로 16강을 바라볼 수 있는 토고전에서 '고교생' 선수들은 골 넣은 기쁨을 만끽하느라 금쪽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유일한 프로 선수인 골키퍼 김승규는 2-1로 이기고 있는 후반 종료 직전 볼을 끌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한국(골득실 -2)은 타지키스탄(-1)에 골 득실 차로 밀려 16강 진출권을 넘겨줘야 했다.

한국 축구는 이미 일본에 추월당했다. 북한에 따라잡힐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정영재 기자·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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