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거침없는' 성지순례중단 발표에 남북 '어쩌나' 당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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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한때 개성 인근 영통사는 천태종의 ‘리틀 해방구’가 됐다.

천태종은 오전 11시부터 영통사에서 백중(우란분절) 천도 대법회를 시작했다. 이날은 목련 존자가 지옥에 빠진 어머님을 구출해 낸 날이라 해서 불교계가 명절로 삼는다.

570여명의 성지 순례 신도 앞에서 영통사 주지인 북측의 혜명 스님의 기념사가 있은 뒤 남측의 답사가 있었고 곧 천도 법회가 진행됐다. 북소리, 징 소리, 피리소리가 주변의 오관산을 요란하게 때렸다. 갑자기 빗발이 굵어졌다. 마지막 순서인 회향제가 끝나나 싶더니 무원 스님(천태종 사회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긴급 발표를 시작했다.


*개성 인근 영통사 보광원 앞에서 천태종의 무원스님(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성지순례 중단선언을 하고 있다. (개성 영통사=안성규 기자)

‘성지 순례 중단 선언에 대한 결의문’이었다. ‘통일부가 월 1회로 제한하고 있는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 방침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성지순례를 중단하겠다’고 한 것이다. 남측 신도들은 어리둥절했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ㆍ민화협 등에서 나온 북측 인사들도 멍해졌다. 안내원들은 당황하며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술렁였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북측에 사전에 통보해 허가를 받거나 양측이 합의해야 한다. 이런 절차는 다 생략됐었다.

남측 통일부에게만 직격탄을 날린 것도 아니다. 법회 초반, 인사를 위해 마이크 앞에선 남북 경협 시민연대의 김규철 대표도 “개성 관광이 지연되고 있는데 원인이 북측에도 있는지 밝히라” “개성 공단과 연계시켜 남측 관계자 시내관광을 금지시킨 조치가 지나친 조치가 아닌지 북측은 밝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측에 사전 통보됐으면 불가능했을 발언이다.

비공개석상에서 남측 관계자가 북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는 일은 있지만 북한 땅에서 공개적으로 이처럼 남ㆍ북 당국을 함께 비판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뿐 아니다. 천태종은 법회가 끝난뒤 영통사 한쪽 정자에 모여 기습 토론회를 벌였다. 제목은 ‘남북 문화교류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였다. 당초 개성 시내 민속여관으로 예정돼 있었는데 장소가 긴급히 바뀌었다. 일반 신도에게도 공개됐고,북측 안내원들도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발표자의 목소리를 구석에 앉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무원 스님은 “정부가 천태종에 ‘개성 관광을 열게 하라’는 과제를 줬다. 우리가 현대 앞잡이인가. 도리에 안 맞는 요구다. 개성관광 때문에 성지순례가 막히는 것은 안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참석자는 “허가나 합의 없이 북한 땅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천태종은 귀경길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서도 ‘성지순례 중단선언에 대한 결의문’을 배포했다.

정부를 규탄하고, 유인물을 돌리는 등, 남쪽의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북한 땅 영통사 등에서 벌어진 것이다. 천태종의 거침없는 행보에 북측은 당황해 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중단 선언 왜 했나= 개성 영통사는 고려시절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사찰로 천태종의 성지다. 조선시대 폐허가 됐는데 2005년 남북 합작으로 복원됐다. 복원 사업에 자금을 댄 천태종은 ‘성지 순례 정례화 사업’을 추진,북측과 합의했다. 지난 6월 영통사·선죽교· 고려민속박물관 등 개성 시내에 위치한 유적지를 당일 일정으로 시범순례를 실시한 이후 지난달부터 본격 순례 행사에 들어갔다.

상황이 꼬인 것은 천태종ㆍ북측의 합의 내용에 통일부가 급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천태종과 북측의 합의는 ‘인원제한 없는 무제한 순례’였다. 그리고 인원은 대략 ‘연 10만 명’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통일부는 이를 대폭 줄여 지난달 15일 ‘월 1회, 500명’ 조건으로 정례화를 승인했다.

천태종은 일단 순례에 들어갔고, 통일부의 양해 아래 편법으로 4회에 걸쳐 1500명이 한달 사이에 순례를 했다. 그러나 천태종 관계자에 따르면 ‘합의대로 하라’는 북측의 요구가 거세졌다. 또 교단에서도 ‘편법으로 계속 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통일부가 ‘현대의 개성관광 연고권을 보호해 성지순례를 제한하고 있다’는 반발도 작용했다. 성지순례 귀환 길에 잠깐 들르는 개성을 ‘개성관광’으로 인식하고 현대 아산을 위해 통일부가 이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결국 ‘북측 요구대로 할 수도 없고, 통일부의 방침에 따를 수도 없는 사정’이 복합돼 중단선언이라는 돌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돌파구를 찾는 듯했던 ‘개성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양상이다.

그러나 통일부ㆍ천태종ㆍ북측 모두 ‘성지순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어 파국을 맞을 가능성은 낮다. 우선 천태종은 순례를 포기할 수 없다. 통일부도 개성 이북에서 현재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지순례의 물꼬를 틀어막고 있다는 비난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통일부 관계자도 “종교의 자유를 막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한다. 북측은 ‘성지순례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을 포기할 처지가 아니다.

문제는 결국 ‘횟수와 인원, 그리고 개성관광에 대한 입장정리’다. 북측의 아태 김남길 참사는 “횟수 제한없이 500명 이내로 들어와야 한다”고 기자에게 말했지만 뒤로는 “천태종의 입장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여지가 있다.
영통사 ‘리틀 해방구’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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