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열전>최장수 내무장관 김치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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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新軍部 세력에 의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취해진80년 5월17일 오후9시30분쯤.이제 막 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金致烈씨는 서울신당동 자택에서 보안사 요원 3명의 갑작스런방문을 받는다.
『잠깐 모시고 가겠습니다.』순간 이상한 낌새에『무슨 일이냐.
지금 꼭 가야 되느냐』고 되물었지만『잠깐 가셔서 누구를 만나시면 됩니다』며 요원들은 다급히 재촉했다.그러면서도『호텔로 안내해 모시겠다』고 정중한 태도를 잃지않았다.
호텔이라는 말에「순진하게 정말로 생각하고」그들을 선선히 따라나섰으나 정작 이끌려 간 곳은 당시 악명높던 보안사의「서빙고호텔」.그는 이곳 보안사 서빙고분실 2평 남짓한 쪽방에 갇힌채 1주일동안 조사를 받는다.
이유인즉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렸고,또다른 것은 DJ(金大中前民主黨대표)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당시 계엄사가 발표한 그의 재산 규모는 34억4천여만원.그러나 계엄사의 조사결과 그가 부자임엔 틀림없지만 부정축재는 하지않은 것으로 밝혀졌다.정치자금제공설도 소문에 불과할 뿐 사실이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결국 金씨는 권력형 부정축 재자로 몰려 계엄사에 연행된 30여명중 유일하게「무혐의」로 풀려난다.
신군부가 득세하기 바로 직전까지 검찰총장과 내무.법무장관을 연달아 지낸 3共말기「헤비급 실력자」였던 金씨가 이같은 수모를당하게 된 것은 원천적으로 그의 장관 재임때의 행태와 직.간접적으로 선이 닿아 있었다.
그는 유신 중반기인 75년12월부터 3년10일 동안의 최장수내무장관에 이어 10.26사건을 전후한 1년여동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다.
법조인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와 경륜,소신과 추진력을 겸비한데다 朴正熙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정보부차장(70년)→검찰총장(73년)→내무장관→법무장관(78년)등 3共 후반기 화려한「官運」을 누린다.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특 별한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보부차장이 되기 전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단지 朴대통령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사심없는 소신에 공감하고 끝없는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권력자와의 거리에 비례해 그 힘이 평가되던 시절 그는 항 상 대통령과의 독대와 直報가 가능할 정도의 근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집무중 대통령이 알아야 하고 조치해야 할 사안이 발생하면 내무장관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몇시간이고 틀어박혀 자신이 직접 보고서를 쓴후 비서를 시켜 청와대 부속실장에게 전달,朴대통령에게 直報하곤 했다.
당시 관계자는『金장관은 일개 부처의 장관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정을 공동책임지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정책 전반에 걸쳐건의하고 행동해왔다』고 말한다.
이같은 그의 독특한 행태는 정치권력의 역학구조상 필연적으로 경호실장.정보부장등 권력 핵심부로부터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 돼「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車智澈경호실장은 金장관이 청와대 보고를 마치고 나오면간혹『차 한잔 하시죠』라며 자기 방으로 불러『혹 두 분 사이에저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까』고 자신을 따돌린데 대한 섭섭함을간접적으로 표시하곤 했다.
더구나 집과 사무실은 항상 도청대상이 됐고 정보부는 은밀히 그의 재산상태를 뒷조사해 청와대에 보고하기도 했다.내무장관에 오른지 1년 가까이 된 76년말 그는 갑자기 청와대의 부름을 받는다.청와대 2층 집무실로 들어서자 朴대통령이 서류를 꺼내보이며『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책하듯 따져 물었다.
그 서류에는 그의 재산목록이 빽빽이 기록돼 있었다.공직자 부정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엄격했던 朴대통령이 정보부가 조사해 올린 金장관의 재산규모를 보고 진노했던 것이다.
金장관은『각하,변호사 9년동안 돈벌어 소문대로 땅도 사고 집도 새로 지었습니다.그러나 공직생활동안 새로 산 부동산은 하나도 없고 부정축재한 것 아닙니다』고 해명해 간신히 朴대통령의 노여움과 오해를 풀 수 있었다.그러나 바로 이때의 재산목록이 정보부에 그대로 보관돼 있다가 훗날 그를「권력형 부정축재자」로내모는 빌미가 된 것이다.
장관 재임동안 통치자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던 까닭에 金장관은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약점 잡힐 일을 스스로 자제하며 소신껏 일했다.그 스스로도「죽어도 국회의원 안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권에 추파를 던질 필요가없었다.때문에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도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당시 국회 내무위때 툭하면 각료들에게 삿대질을 해대던 야당의원들까지도 金장관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질 못했다.
이 덕분에 그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3년여동안 내무부와 경찰조직은 일체의 외풍을 타지않고 안정기를 구가했고 그는 역대 내무장관중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졌던 장관으로 기억되고 있다.이때부터 항간에 후임 정보부장설이 나돌 정도로 그의 힘과 신임은 막강했다.그에 대한 朴대통령의 신임은 그의 능력 뿐만 아니라 소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金장관의 굽힐줄 모르는 소신은 내무장관 재임중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농촌주택 개량 사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국민의식이 바뀌려면 주택구조와 생활환경이 먼저 바뀌어야한다고 믿었다.
朴대통령까지『돈 많이 드니 보기싫은 집만 골라 고쳐라』는 주문을 했지만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농촌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오늘처럼 번듯한 농촌주택 개량을 이뤄냈다.
자연보호헌장.자연보호의 날 지정등 자연보호 정책과 소도읍기능화사업(정주권사업)도 그의 주요 업적.
내무부 관계자들은『金玄玉내무장관이 초기 새마을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金장관은 새마을운동을 한단계 도약시킨 장본인』이라고평가한다.
선거 주무장관으로서 그가 치러낸 78년 12.12 총선은 역사상 가장 깨끗했던 국회의원선거로 평가되기도 한다.
***잦은「쿠데타 人事」 그는『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있는데다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마당에 부정선거가 행해지면 과거 3.15 부정선거와 같은 국민 저항의 도화선이 되고만다』고 생각하고 부정선거 방지에 심혈을 쏟았다.
결과로 의석수는 공화당이 많았지만 득표수는 신민당이 1.1%앞선 사실상의 야당 승리였다.물론 유신정권에 식상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의 표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공명선거에 관한 의지가 一助한 결과였다.
金장관은 특유의「파격인사」「발탁인사」로 내무부와 검찰.경찰조직을 장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78년12월 법무장관에 취임한 金장관은 취임 2개월만에 서울검사장등 검사장 6명의 사표를 받는 충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현직 서울검사장에게 특별한 문책요인이 없는데도 승진시키지 않고사표를 받은 것은 검찰 인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 다.당시 언론은 이를 두고「쿠데타인사」라고 평할 정도의 파격이었다.
경찰 또한 검찰 출신 金모씨를 핵심자리인 3부장에 기용,경찰의 별인 경무관 6명을 잘라내는등 대대적인 숙정을 벌였다.
金장관은 장관 재임중 부하직원들로부터「면도칼」「차돌」「독일병정」으로 불렸다.
『강한 성격탓에「적」도 많았다』고 한 내무 관계자는 회고한다. 79년 10월 신민당 金泳三총재 제명파동 직전 법무부로 자리를 옮긴 金장관은『강경책이 百藥之長이라면 팔레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라는 일종의「상소문」을 마지막으로 朴대통령에게 올린다.그러나 강공수로 일관하던 정 국은 결국釜馬사태→10.26으로 이어지고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게된다.
〈鄭順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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