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시인, 자연에 녹아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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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남준 산방 일기

박남준 지음
조화로운 삶,
234쪽, 9800원

시인은 모두 특별한 존재지만, 여기 정말 별난 시인이 있다.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하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고 맘 먹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간 박남준(50) 시인이다.

지리산 자락 악양 동매마을에 사는 독신의 시인은 자타칭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에너지 소비량이 가장 적은 사람 중 하나’다.

몇 숟가락 되지 않는 밥을 한두 가지 찬에 하루 한 끼, 또는 두 끼 먹는다. 배설물은 한 점도 버리지 않고 텃밭 거름으로 쓴다. 양치질 할 때는 치약 대신 구운 소금을, 설거지 할 때는 모래나 재를 쓴다. 그가 손에 쥔 돈은 장례비 200만원. 시인은 이 돈을 ‘관 값’이라 부른다. 물질에 초연한 삶이다.

 이 책은 자연 속에서 자족하는 삶의 기록이다. 시인은 앵두나무 한 그루, 매화 한 송이, 잠자리와 귀뚜라미 한 마리에 각별함을 부여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혼자 사나 홀로 살지 않는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거기 어찌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 그 옛날 초야에 묻혔던 선비가 누렸던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세속사에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버린 유유자적만은 아니다. “모든 문제에 경제라는 물질적 잣대를 들이대며 세상을 바라보게 한” 경제 우선 정책에 분노하고, 조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증오한다. 그래서 시인이다.

 삶을 산다기보다 누린다는 표현이 걸맞은 ‘박남준 스타일’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어쨌든 선(禪)사상 다분한 한 줄 한 줄이, 읽는 동안 마음 속에 잠시 청량한 바람이 부는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질에 발목 잡혀 사는 이 시대, “매이지 않는 정신을, 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다”는 시인의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부럽기도 하다.

책 말미에 실린 소설가 한창훈씨의 추천사 ‘박남준 시인 말입니까’도 명문이다. 소혹성 B612호에서 온 ‘어린 왕자’ 같은 시인의 면모를 음미할 수 있으니.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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