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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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20) 아궁이 쪽으로 몸을돌려 앉으며 송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가래를 돋우듯 목을 가다듬으면서 송씨가 말했다.
『그 피가 어디 가겠니.그 애비에 그 자식이겠지.그 내력을 어떻게 숨기겠냐.그놈이 만주를 갔다고 그러면 그럴테지 무슨 아편장사를 하겠냐.독립군하겠다고 나섰다면 제 갈길 제대로 간 거지.에미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은례는 구박으로몇 번 더 여물을 퍼 구유 가득 담아주고 나서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삭정이가 타고 남은 아궁이의 불덩이들이 두 사람의 얼굴을 붉게 비춘다.
『왜 이 생각이 나나 모르겠다만,나라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네 외할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단다.조선사람은 문기(文氣)가너무 세다는 거야.그게 탈이라나.왜 그 임진란 났을 때,그때도왜놈들을 피해서 대궐을 버리고 북쪽을 피란을 떠나야 했다지 않니.그 때 말이다.우리 대궐의 신하들이 쫓겨가면서 뭘 했냐 하면 시를 지어서 하늘에 바쳤대요,시를.』 『시를 지어요?』 『누가 아니라니.나라를 구해 주소서 하고 시를 지었대더라.아니 그래 한쪽에서는 총칼 들고 죽이겠다고 쫓아오는데 하늘에다 시를지어 바친다고 그 오살을 할 놈들이 물러날까.그저 조선사람들 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니까.』 은례는 아궁이의 불길을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었다.자상한 분이었으니 자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다 해 주셨었나 보다.은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아궁이의 더운 기운에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글을 읽기로야 외할아버지가 아버지 보다 윗길이었다고 들었다.
소들은 김이 오르는 여물을 씹고,모녀는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부지깽이로 불을 뒤적이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오래비가 성질이 불같아서 벌컥벌컥 성은 잘 내지만서도 그래도 그 녀석이 오사바사 정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런 소리는 또 왜 해요.』 『어디 하룬들 눈앞에서 어른어른 하지 않는 날이 있다더냐.어렸을 땐데 한번은 느이 아버지가 무슨 심사에선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한테 어렵게 고무신을 사다 주지 않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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