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장 수사/비자금 불똥… 바짝 엎드린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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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농촌·학맥의원들에 시선 쏠려/민자 “또 국회 도덕성 먹칠”… 정치복선설은 일축/민주선 UR비준 앞두고 “본때 보이기” 의심도
한호선 농협중앙회장이 지난 총선때 1백여명의 국회의원 출마자들에게 「돈봉투」를 건넨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밝혀지자 여야 정치권이 긴장하고 있다. 민자당은 문제의 총선지원금이 수사대상이 아니라는데 일단 안도하면서도 정치권 전반의 도덕성 실추와 수사진전에 따라 또다른 금품수수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민주당은 1백여명속에 야당 의원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수사가 농협중앙회장 선거·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국회비준을 앞둔 시점인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자당은 겉으로 검찰 수사진행을 좀더 지켜보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속마음은 편치 못하다. 자금지원의 대상이 된 1백10명 가운데는 여당 의원이 많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법처리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해서 모른체 그냥 넘길 수도 없다. 국회 노동위 돈봉투사건으로 가뜩이나 실추된 정치권의 도덕성이 더욱 손상입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고위당국자는 『국회 돈봉투사건이 잊혀질만 하니 또다시 농협사건이 생겨 의원들 전체가 매도당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민자당은 특히 한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에 대한 앞으로의 검찰 수사과정에서 의외의 돌출상황이 생길까봐 걱정이다. 한 회장이 정치권과도 상당한 교분을 유지해오는 등 「마당발」인데다 씀씀이 역시 컸던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농촌출신 및 농림수산위 등 국회 관련 상위의원들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가고 있다. 물론 이들은 한결같이 금품수수 사실을 부인한다.
한 회장과의 K대 동문의원들도 곤혹스런 입장이다. 벌써부터 그와 가까이 지내온 몇몇 의원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정수 사무총장은 『이번 사건 수사착수에 특별한 정치적 배경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문민시대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농협비자금의 정치권 유입설을 지켜보는 민주당의 눈길은 복합적이다.
우선 지난 1년여간 정치권의 몸을 사리게 했던 「비자금」 파문이 다시 제기되는데 긴장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 UR비준 파동이 휘몰아칠 것을 예상하면 과연 다른 복선은 없는가 하는 의심을 앞세운다. 또 밑도 끝도 없는 비자금의 정치권 유입소동이 다시 일어나는데 반발의 기류도 엿보인다.
이기택대표는 7일 한 회장의 구속에 대해 『신중하게 보아야 하겠다』며 여러측면을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다.
농협의 기구적인 성향으로 보아 야당보다는 여권에 더 가깝다는 점이 불안감을 줄여주는 원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 의원은 『한 회장이 워낙 마당발이어서 비자금을 돌렸다면 여야의원 할 것 없이 찾아 다녔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야만이 의심의 표적은 아니라는 불안감이 은은히 번지는 것이다. 「검은 돈」에 대한 의심은 심증만으로 정치권에 비난이 쏠리는 것도 부담이다. 정치자금 풍토가 왜곡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UR 비준투쟁을 일찌감치 밝혀온 민주당으로서는 정치적인 배후에 대한 의심을 더욱 앞세우고 있다. 제네바까지 가 쌀개방 반대투쟁을 벌였고 정부정책에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한 회장을 구속함으로써 UR비준의 강경한 의지를 천명했다는 것이다.
박지원대변인은 『UR 반대투쟁과 국회비준 반대운동을 앞두고 괘씸죄로 구속되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논평했고 농림수산위의 다른 의원도 『괘씸죄에 걸린 표적수사 같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한 회장의 구속은 개인비리에 대한 당연한 조치일뿐 표적수사니 하는 다른 정치적 복선이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다만 한 회장이 UR협상 때 쌀시장 개방 반대운동을 주도해온 것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한 회장의 이러한 행각이 자신의 입지강화를 위한 제스처라는 흔적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청와대는 한 회장이 80년대초 당시 실력자로 행세한 전모씨를 업고 등장한 이래 십수년간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왔다는 것이고 이를 마치 농협을 위한 일처럼 가장해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동안 한 회장의 비리를 고발하는 수많은 고발·투서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수사가 안 이루어진 것부터가 한 회장의 행적을 말해주는 증좌라는 지적이다. 청와대는 한 회장 개인의 비리도 문제였지만 이런 한 회장을 그대로 두고서는 농협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곡해의 여지가 있음에도 칼을 뽑을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김현일·신성호·박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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