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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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림=김태헌]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수만 개의 흰 나비 떼처럼 혹은 일찍 찾아온 봄 꽃잎처럼 세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학교 현관 입구에서 길을 나서려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벌려 내리는 눈을 손바닥 가득 안았다. 하얀 눈은 아무런 무게감도 없었다. 누군가 가느다란 붓을 들어 선명하게 하늘에 그려놓은 듯 나뭇가지들의 윤곽이 뚜렷했다. 나는 그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여름이었다. 진초록에 눈을 델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울긋불긋 단풍이 내렸었다. 다시 바람이 불고 흰 눈이 내리고 잎들이 연두색으로 피어났었다. 그런데 그 초록은 지금 아무 데에도 없고 세상은 온통 흰 눈보라로 덮이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위녕과 지금의 위녕은 같은 사람일까.
 
이 여섯 계절 동안 나는 아주 많은 인생을 살았다. 엄마에 따르면 나이가 먹어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삶이 단조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자면 내게는 이 여섯 계절이 아주 길었다. 난생처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많은 것들을 경험했던 것이었다. 엄마라는 존재와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동생들과 싸우고 또 화해했다. 엄마의 남자친구를 보았고, 먼 곳에 둔 아빠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내 가방 속에 든 대학 입학 지원서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엄마에게 무어라 이야기할 것인가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는 내 결정에 동의해 줄 것인지, 또 아빠는….
 
나는 약속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위녕, 마침 잘 됐다. 엄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5분 정도면 네 학교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 엄마가 데리러 갈게. 원서는 썼지? 담임선생이 어디 내라고 하디?”
 
“만나서 이야기해, 엄마.” 나는 교문 앞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의 차는 우리 학교 교문 반대편 차도로 들어와서 저 길 위에서 유턴을 한 다음 내 앞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이 학교에 전학을 온 이후 나는 엄마에게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라고 자주 조르곤 했다. 엄마는 내가 막내 제제보다 더 엄마를 조른다고 가끔은 투덜댔지만 대개는 말이 없이 내게로 오곤 했다. 나와 엄마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엄마를 기다리고 서 있을 때 엄마 없이 학교 문을 나섰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곤 했었다.

엄마의 은색 지프가 학교 반대편 길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엄마는 창을 약간 내리고 내게 손짓을 한 다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눈이 엄청 내리겠는걸, 어서 집으로 가자…. 그래 서울에 있는 대학엔 갈 수 있는 거니?”

엄마는 기어를 바꾸어 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대답이 없자 엄마는 힐끗 나를 곁눈질했는데 그때 엄마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는 역시 눈치가 빠르고 그리고 직관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이 불편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왜 대답이 없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간대?”

“엄마…, 나 지방에 있는 교대에 원서 냈어. 서울 근처에 있는 교대는 워낙 커트라인이 높아서….”

엄마가 입을 벌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그런데 난데없이 웬 교대? … 너 선생님 되려고 그러는 거야? 너…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잖아. 그리고 지방에 있는 교대라면 집을 떠나야 하는 거야?”

생각보다 더 많이 엄마는 당황하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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