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경찰은 힘이 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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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토요일 오후 강원도 횡성. 나는 어느 산길의 한적한 2차선 도로에서 운전 중이었다. 20~30m 앞 도로 건너편 구석 자리에 경찰 백차가 보였다. 과속 차량을 잡으려고 잠복해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빙긋이 웃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차, 지금 운전 중에 전화하고 있잖아.” 후다닥 휴대전화를 옆 자리에 던졌다. 웬걸, 백차가 중앙선을 천천히 넘더니 내 차 뒤에 따라 붙었다. 백미러로 보니 경광등이 번쩍번쩍했다.

“뭐야, 나 걸린 거야?”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차의 속도를 줄여봤다. 좀 더 빠르게도 달려봤다. 그때마다 백차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쫓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 10여 분간 정말 기분이 찜찜했다. 하지만 산길이 끝나고 간선도로에 도착하자 백차는 다른 쪽으로 휙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죄짓고 못 산다더니…” 쓴웃음이 났다.

수습기자 때부터 7년 넘게 경찰서를 출입했었다. 사건기자 팀장도 1년 반 동안 했다. 그땐 경찰서에서 하루 종일 살다시피 했다. 나도 반쯤은 경찰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경찰 보면 좀 떨린다. 뭘 잘못했는지, 딱지 떼이는 건 아닌지. 보통 사람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고 보면 경찰 직급은 별로 높지 않다. 경찰서장은 총경인데 서기관급(4급)이다. 하지만 경찰을 직급으로만 파악하면 큰코다친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관할 인구가 62만 명이다. 그 지역엔 국회의원만 갑·을·병구에 세 명이다. 영향력의 범위만이 아니다.

술집 앞에 교통 의경 한 명만 서 있으면 그 가게는 파리 날린다. 어느 술꾼이 경찰이 얼씬거리는 술집에 가겠는가.

기자 생활 20년간 다양한 권력을 목격하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권력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세진다.” 장관이나 국무총리? 일반 국민은 그런 분들 얼굴 볼 이유도 없다.

정부 조직 내에선 별 볼일 없어도 대민(對民) 권력은 막강한 이중성, 그걸 이해해야 경찰을 안다고 할 것이다.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경찰 영화가 국경을 넘어 인기를 끄는 건 그 때문이다.

대한민국 경찰은 항상 힘이 셌다. 옳지 않은 짓도 꽤 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1980년대 시국 사건 때만이 아니다. 요즘 경찰이 어떤지는 한화 김승연 회장의 폭행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택순 경찰청장은 한화그룹 유시왕 고문과 골프를 치고도 “그런 사실 없다”고 했다.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자 “이 사건과 관련한 골프가 아니니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그런 말장난을 믿을 국민은 없다. 부하 경찰들도 안 믿을 것이다. 다만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니 꾹꾹 참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경찰이 모든 감시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다. 기자실을 없애고 기자들은 경찰서에 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찰이 브리핑할 때만 오란다. 처음엔 이게 노무현 정부에서 새롭게 권력기관으로 등장한 국정홍보처 작품인 줄 알았다. 경찰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는 걸로 알았다. 하지만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경찰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민원실·형사계·교통사고 조사반은 출입해도 된다”고. 국민의 알 권리를 갖고 흥정하나? 그냥 어이가 없다.

이택순 경찰청장에게 묻고 싶다. “기자들 다 쫓아내고 다시 밀실로 들어가 뭘 하려느냐”고.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사고 치게 돼 있다. 과거에 보았듯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정권이 져야 한다.
 
요즘 순경 공채 시험 경쟁률은 수십 대 일이 넘는다. 대부분 4년제 대졸 이상의 우수 인력이지원한다. 젊은 경찰관들 만나면 눈망울이 반짝반짝한다. 영국 경찰만 존경 받으란 법은 없다. 한국 경찰도 희망이 있다.
 
한 가지 조건은 있다. 여전히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조직보다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듯한 수뇌부의 개혁이 이뤄지면 말이다.

김종혁 사회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