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도 국제화… 외국어 능숙(경찰과 시민사회: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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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폴 “한국경관 영어 안통해 애로”/외국참고인 조사에 수억원 지출/홍콩
지난달초 일본경찰청 국제협상과장 세이사쿠 다니구치씨 등 경찰관 4명이 언론의 눈을 피해 현해탄을 건너온 적이 있다. 지난해 11월23일 동경 닛포리역에서 한국인 소매치기 일당 5명이 경찰에 맞서 마취 스프레이와 생선 회칼을 휘두르며 대치극을 벌인 사건 직후였다.
경찰이 실탄을 발사,옆구리·다리에 총을 맞은 최찬승씨(38)를 포함해 3명을 붙잡긴 했지만 야쿠자들도 함부로 공권력에 도전하는 일이 없는 일본에선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10여일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세이사쿠 과장 등은 우리 소매치기의 계보와 숫자를 파악한뒤 조용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국제화된 범죄를 풀어내기 위해 선진국 경찰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사건을 해결해왔다. 홍콩경찰의 심장부인 경찰본부의 인터폴 사무실에서 만난 리윙광(이영광) 경정은 88년 우리나라에서 수사를 벌였던 경험담을 소개했다.
국내 굴지의 S,L그룹 등 6개 대형무역업체와 중국 6개 업체가 2천2백여만 홍콩달러를 사기당한 알려지지 않은 국제사기사건 때문이었다.
홍콩의 사기단이 유령업체를 차려 2천2백여만 홍콩달러어치의 의류를 수입한뒤 하자가 있어 돌려준다며 일본 선박회사 명의를 도용,서류상으론 물품을 반송한 것처럼 꾸미고 물건을 빼돌렸다는게 사건의 전말이다.
사건 당사자국인 한국·중국·홍콩외에 명의를 도용당한 일본 선박회사·미국계 은행 등 모두 6개국에 걸쳐 40여명을 수사해야 했던 국제적 사건이었다. 홍콩경찰은 리 경정 등 경찰 수사관 2명을 중국·한국에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직접 현지인들을 상대로 1주일간 수사를 벌였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범인들을 체포한뒤 홍콩경찰이 보인 태도였다. 4개국에 흩어져 있는 중요 참고인 20여명 모두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항공료·호텔비·체재비는 물론 소속회사에 직원이 빠진데 따른 일당 모두를 홍콩경찰이 지급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홍콩경찰이 쓴 비용은 수억원.
『외국인이 피해를 본 사건을 해결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을 쓴 것 아니냐』는 물음에 리 경정은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마음놓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우리 홍콩경찰로선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콩엔 갱단인 「트라이아드」가 캐나다에서 중국인을 납치한뒤 몸값을 스위스은행에 받아내는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경찰 수사가 여러나라에서 이뤄지며 자연히 홍콩경찰의 국제적 감각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리 경정은 『아시아에서 인터폴과 가장 긴밀한 협조를 맺고 있는 것이 홍콩경찰로 인터폴의 2인자가 홍콩경찰 출신이며 국제적인 범죄해결에 있어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홍콩경찰은 우리 경찰과는 비교할 수 없이 국제화돼 있다. 물론 이같은 국제적인 수사를 위해서는 감각과 의식도 문제지만 필수적인 것이 외국어능력을 포함한 경찰의 자질이다.
외국어에 능숙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는 수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홍콩의 거리를 걷다보면 빨간 견장을 어깨에 붙인 경찰관들이 자주 눈에 띈다. 영어에 능통한 경찰관이라는 표시다. 국제도시답게 중국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국제화된 홍콩경찰의 상징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일본경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국제화 대책 강화의 해」로 삼고 국제화에 바차를 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외국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국제수사관」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국제수사연구소에 국제수사 코스를 마련하고 있다. 기존의 영어·중국어·한국어외에 예상되는 동남아인들의 범죄증가에 대비,필리핀어·태국어·파키스탄어 등도 추가했다.
대한민국 경찰은 어떤가. 불행히도 우리 경찰의 수사력은 외국에 전혀 못미치는 것은 물론 어학실력도 수준미달이다.
『일반경찰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인터폴 관련 경찰관들과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어 놀랐다』는 것이 홍콩 인터폴 리 경정이 경험담이다.
게다가 88년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세미나에 참가했던 리 경정의 또다른 이야기가 취재진을 부끄럽게 했다.
당시 인터폴 세미나는 전세계 50여개 국가의 외사담당 경찰관들이 모여들어 국제범죄와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리 경정은 『세미나 자체보다 늘 전화나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 받던 각 나라의 인터폴 관계자들과 개인적인 안면을 익혔던 것이 무엇보다 유익했다』고 설명한다.
공식적인 관계보다 실무자들끼리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두면 수사협조가 훨씬 빠르고 수월하기 때문이다.
『중요 선진국은 물론 유고 등 동유럽국가와 인도네시아·말레시아,심지어 스리랑카 같은 나라에서도 대표를 보낸 자리에 한국 경찰간부가 보이지 않아 솔직히 놀랐다』고 리 경정은 술회한다. 일본이 92년 인터폴이나 외국과의 협조를 통해 수사를 벌인 건수가 7백80여건. 10년전에 비해 2.5배가 늘었다. 홍콩은 무려 8천건,영국은 이보다 훨씬 많은 1만6천여건이다.
반면 지난해 우리 경찰이 외국과 협조해 수사한 사건은 고작 11건에 머무르고 있다.
올해는 「한국방문의 해」. 88년 올림픽이후 가장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터다. 게다가 개방화 물결에 외국인 근로자 폭증 등 국제적 범죄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도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줄 아는 인력은 손꼽을 정도다. 그나마 인터폴이나 외국경찰과의 협조를 쉽게 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된다. 언어소통이 시원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포공항 등 국제공항이나 항만 등에서 외국인이 마약을 밀반입하거나 밀수를 하다 적발되더라도 언어장애 때문에 배후 조직을 파헤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어에 능통한 수사관이라면 혹시 이들과 연계돼 있을 수도 있는 국내 조직까지 밝혀낼 수 있으나 역부족이다.
이러다간 야쿠자·트라이아드·마피아 같은 국제범죄단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해결은 고사하고 우리나라 사기꾼에 당한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수사도 어려운 처지다.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국제화의 열풍속에서 「치안의 국제화」도 이미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이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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