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아름다운 패배 "모든 일 잊어버리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박근혜 후보가 경선 결과 승복 연설을 마친 후 어린이들과 손을 맞잡고 합창하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는 대선 후보 당선자 발표 직전인 오후 3시50분쯤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선 결과를 보고받았다.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의 중앙 무대 위 단상에서였다. 유 실장이 전한 메시지는 "아깝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박 후보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장내는 소란스러웠다. 박 후보 지지자 중 50여 명이 "경선 무효"를 계속 외치고 있었다. 이어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그 순간 행사장 내의 모든 시선은 박 후보에게 쏠렸다. 그는 이 후보를 향해 옅은 미소를 보냈다.

이 당선자의 수락 연설 후 연단에 선 박 후보는 침착했다. 그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기꺼이 '아름다운 패배'를 선택했다. 그는 "저를 지지해 주신 동지 여러분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며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을 이젠 잊어버리자"고 강조했다. 박 후보의 하얀색 재킷 상의 오른쪽 주머니엔 후보 수락 연설문이, 왼쪽 주머니엔 경선 승복 연설문이 준비돼 있었다.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박 후보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이 후보가 무대에서 당선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을 때 슬며시 무대를 내려왔다.

체육관을 벗어나자 지지자들이 주변 길거리에 앉아 농성을 하고 있었다. 박 후보는 이들을 뒤로한 채 행사장을 떠났다. 기자들로부터 "한 말씀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묵묵부답인 채였다. 박 후보는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을 도운 사람들을 위해 위로의 말도 전했다고 한다.

박 후보는 "너무 실망하지 말았으면 한다. 정말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끝까지 따라다니고 노력해준 캠프 관계자들과 기자들이 너무 고맙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유정복 실장이 전했다. 박 후보는 "혹시 우리 캠프가 너무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박 후보의 연설 중 "백의종군하겠다"는 말을 두고 당 안팎에선 "경선은 승복하되 한나라당 대선 선대위원장 직을 맡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왔다.

박 후보와 달리 캠프 관계자들 사이에선 선뜻 경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특히 당심에서 이겼으나 여론조사에서 졌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또 행사 전 알려지기 시작한 여론조사 결과가 어떻게 유출됐는지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출했다. 행사장에서는 안병훈 공동선대본부장, 김무성 조직총괄본부장, 유기준 의원 등이 여론조사 결과 유출 문제를 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허용범 공보특보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돼 있는 여론조사 결과가 어떻게 미리 새어 나갈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박 후보의 '경선 승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분란의 소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캠프 관계자는 "당심에서 앞서고도 후보가 못 됐다. 무척 아쉬운 대목이어서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용호 기자<novae@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박근혜 경선 승복 연설 요지>

-경선 패배를 인정한다. 그리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님, 진심으로 축하한다. 국민과 당원의 10년 염원을 명심해 정권교체에 반드시 성공해 주길 바란다.

-정치를 하면서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여러분은 저에게 과분한 사랑을 줬다. 정말 감사한다. 여러분의 사랑, 평생을 잊지 않겠다.

-경선은 이제 끝났다. 경선 과정에 모든 일들, 이젠 잊어버리자. 하루 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몇 날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자. 저와 함께 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여러분의 그 열정을 정권교체에 쏟아주시길 바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