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수 올리기 단속 안한다(경찰과 시민사회: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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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위반 미리 경고… 티격태격 없어/차선·표지개선에 1조원 투입/일본
일본에선 주차단속 때문에 경찰과 운전사간에 다투는 광경을 보기 어렵다. 운전자가 대부분 순순히 승복하는 일본 경찰의 합리성은 다름 아닌 분필끝에 나온다.
오사카 난바(난파)지역 골목길. 왼쪽 팔에는 「주」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오른손에 노란색 분필을 든 여경이 나타났다. 여경은 불법주차돼 있는 도요타승용차의 앞바퀴와 아스팔트 바닥을 연결해 직선을 긋고 바닥에 「10시45분,주차위반했습니다」라고 큼직하게 써놓은뒤 자리를 떠났다.
여경은 40분뒤 다시 돌아와 분필선을 통해 차가 이동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1만5천엔(11만원)짜리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했다. 잠시후 나타난 운전자는 경찰의 조치에 불만을 나타내기는 커녕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일본경찰은 당장 교통체증이 빚어질 때를 제외하곤 이런 식으로 단속 대상이라는 사실을 미리 확실히 알린뒤 30분 이상 여유를 준다. 그래도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비로소 단속에 들어간다.
일본경찰의 합리성은 오사카부 경찰이 최근 선보인 「미니 레커차」에서도 엿보인다. 『당장 교통소통을 방해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차위반 차량 처리가 교통경찰의 최대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런 차량들을 모두 견인하면 운전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그대로 방치하거나 30분 이상 시간을 주자니 교통이 엉망이 되고….』
오사카 경찰본부 주차단속과 스기무라 미노루씨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1년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 의뢰해 롤러스케이트 모양의 미니 레커차를 개발했다』고 소개했다.
미니 레커차에 부착된 잭(작은 기중기)으로 승용차 바퀴를 살짝 들어올린뒤 타이어를 신발을 신기듯 끼워넣으면 여경 혼자서도 승용차를 3백60도 자유자재로 밀어 이동시킬 수 있다.
「단속보다 예방」 「예방을 위한 단속」은 영국·홍콩경찰도 일본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영국의 모터웨이를 지나다보면 눈에 잘 띄는 언덕빼기에 승용차 한 두대가 주차할만한 공터가 보인다. 이곳에 가까이 가면 어김없이 「경찰차 전용 주차지역」(Police Vehicle Only)이라는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영국경찰은 운전자가 확실히 볼 수 있게 이곳에 순찰차를 세워놓고 과속·과적 차량을 신사적으로 단속한다.
홍콩과 구룡반도를 잇는 이스트 터널 안엔 레이다속도 측정기가 설치돼 있어 시속 70㎞ 이상 과속차량의 번호판을 읽어낸다.
홍콩경찰은 이 터널입구에 「레이다 속도 체크」라는 표지판을 큼지막하게 붙여 「벌금을 내고 싶지 않으면 감속하라」고 경고한다.
선진국 교통경찰의 예방활동은 사고발생률 감소로 나타난다.
일본은 현재 가구당 2대꼴인 6천5백만대의 자동차를 보유한 자동차 왕국이다.
일본의 92년 교통사고 사망건수는 1만1천4백51명에 불과해 자동차 한대당 사망률이 세계적으로 가장 낮았다. 같은해 5백20만대였던 우리나라의 사망건수는 1만1천6백40명으로 자동차수는 일본의 10분의 1 이하이면서도 사망자는 오히려 많았다.
일본의 「교통기적」은 국민의 질서의식이나 안정된 사회풍토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은 70년 자동차수가 2천8백만대인 상태에서 1만6천7백65명이 사망할 정도의 교통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70년대를 걸쳐 교통교육 강화,안전시설 정비 등 입체적인 예방활동을 벌인 결과 75년부터 88년까지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를 1만명 이하로 묶어 놓았다. 특히 일본열도 전체에 미비한 차선·표지판을 눈에 띄게 모두 다시 칠한 「대페인팅 작전」은 국제사회에 화제가 됐다.
오사카 경찰본부 교통홍보계장 구보타 고이지씨는 『일본인들은 확실히 질서를 잘 지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폭증하는 자동차사고를 줄일 수 없었습니다. 경찰과 교통안전협의회의 눈부신 예방활동이 국민성을 뒷받침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경찰의 교통전문가들은 후미진 곳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나 딱지를 떼는 「함정단속」이나 실적위주의 「건수 올리기 단속」은 지양하고 단속활동도 예방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확신시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와함께 우리처럼 외국인들이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을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런 교통표지판,오히려 사고를 유발하는 신호체계와 밤엔 분간하기도 힘든 희미한 차선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대페인팅작전에 1조원을 투입해 교통체계를 혁신,사고발생률을 낮춤으로써 교통사고 때문에 생기는 수십조원 이상의 사회비용을 줄였다는 사실은 우리 정책 결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싱가포르 교통안전공원/실제거래 맞춰 국교생에 교통교육/경찰선 학교대항 「놀이대회」 개최도
싱가포르 동쪽 이스트코스트공원 옆에는 싱가포르 경찰이 자랑하는 교통안전공원(Road Safty Park)이 자리잡고 있다. 1만2천평 내부에는 신호등·횡단보도 등이 일반 거리와 똑같이 설치돼 있고 모형 전기차와 자전거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싱가포르 어린이들은 국민학교 5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이곳에서 실제상황과 똑같은 「교통놀이」를 한다. 매일 오전·오후 두번 실시되는 이 놀이는 한번에 2백여명이 자동차·보행인·자전거 등 3개조로 나뉘어 어린이 각자가 정해진 코스를 돌아 출발점에 돌아오면 된다. 참가자들은 조그마한 도로를 따라 깜찍한 전기차와 자전거를 몰고 돌아다니며 신호등에 빨간색이 켜지면 멈추고 횡단보도앞에서 속도를 줄인다. 또 보행인들은 파란 신호등에서 횡단보도 좌우를 살펴가며 건너간다.
지도경찰은 신호등과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어린이들이 제대로 신호와 교통규칙을 지키며 다니는지 체크하고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는다. 경찰은 매년 학교대항 교통안전 놀이를 개최,우승한 국민학교에 1천싱가포르달러(50만원)을 주고 있다. 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교통안전교육을 시킬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질서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얻고있는 것이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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