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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역사칼럼] 사형으로 엄벌한 어우동 性 스캔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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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27면

‘어우동’은 식상하다? 맞는 말이다. 소설이니 영화니 콩트 등등에서 얼마나 많이 회자되었는가? 그 섹시 코드는 식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우동이 과연 어떤 심정으로 그 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게 됐는지, 또 그렇게 남자관계가 많으면 반드시 죽어야 했는지 등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우동 사건은 개인적 성(性) 스캔들로만 보기에는 뭔가 예사롭지 않은 시대적 배경이 있어 보인다.

어우동(?∼1480) 또는 어을우동의 성은 박씨다. 박어우동? 이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처음에 남편(태강수)이 불러들인 은장이를 좋아해서 여자 종인 척하고 같이 놀다가 마음속으로까지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이때까진 성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쫓아냈다. 친정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탄식하며 지냈다. 그런데 한 여자 종이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탄식만 하십니까?”라며 오종년이란 인물을 소개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남자관계가 다양해졌다. 종실(宗室) 이기와 이난, 양반인 구전, 홍찬, 이승언, 오종년, 감의형, 박강창, 상민(常民)인 이근지, 노비 지거비. 확실히 관계한 것으로 판명 난 남자들이 10명이다. 끝내 무혐의 처리된 고위직의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을 합치면 거론된 인물이 모두 16명.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자관계가 많다고 해서 꼭 죽어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었을까?

조선이 차용한 대명률(大明律: 명나라 형률)에는 간통의 처벌 규정이 남녀 공히 장(杖) 80이다. 그러니까 남녀가 처녀든 총각이든 혼인 외의 성관계를 가지면 그게 바로 간통이고, 그 간통에 대해서는 곤장 80대를 맞게 돼 있었다. 단, 유부녀는 10대를 더해 90대를 맞아야 했다. 유부녀는 ‘10대 더’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어쨌든 그러면 어우동도 원칙적으로는 장 90대를 맞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어우동은 교형(絞刑: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건 오버다. 왜 조선은 이런 오버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지금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죽여도 시원치 않으나 인주(人主: 왕)는 살려주는 것을 덕으로 해야 하니 형률을 넘는 형벌을 써서는 안 됩니다.” “형벌은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하는 것입니다. 어을우동은 음란하기 짝이 없으니 마땅히 중전(重典: 사형)으로 벌해야 합니다.” 성종실록에서 명백히 의견이 갈렸다. 최종 결정이 나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살려주자는 의견이 더 많았으나 죽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왜 그랬을까?

세종 때 유사한 사건의 주인공인 감동(甘同)은 죽지는 않았다. 유배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또 비슷한 시기 유씨 부인은 일대일 간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형을 당했다. 그러니까 조선은 죽이기도 했다가 살리기도 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도덕사회로 가기 위해 조선은 때로 부담스럽지만 가중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우동은 그 와중에 있었고 정도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면 어우동에 대한 가중처벌은 효과가 있었을까? 인류 역사 이래 간통은 끊임이 없었고, 조선에서도 물론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우동과 같은 일대 다수의 간통은 그 이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어우동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좀 심할 뿐이다.” 이는 곧 어우동의 심정이었으리라. 즉 자신의 욕구에 적극적인 것. 어우동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조선의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보다는 감정을 절제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다. 도덕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에서 그것이 주류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우동을 통해 조선사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