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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의 인권보호/피의자수사땐 권리부터 설명(경찰과 시민사회: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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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루 8시간 수면·2시간마다 휴식/연행중 다치면 경관 징역
지난해 오사카지법은 체포과정에서 피의자에게 상처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경관(31)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경관은 운동장에서 소란을 피운 회사원을 체포하면서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기소됐었다.
일본경찰이 자체 징계정도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을 유죄로 처벌하게 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차대전 직후부터 일본경찰의 최대 현안은 고문경찰로 상징되던 인권침해 시비를 없애는 것이었다.
48년 형사소송법 등의 제·개정으로 경찰 수사권이 독립되자 인권침해를 우려하는 각계의 목소리는 거셌고 나름대로의 인권보호를 위한 교육에 힘썼지만 체포·수사과정에서 인권시비는 계속됐다. 도처에서 경찰의 수사권 박탈 주장이 비등했다.
경찰 스스로 의식개혁만으론 안되겠다는 한계를 느꼈다. 경찰은 즉각 제도개선에 나서 53년 체포장 청구권을 경감 이상으로 상향조정했고 57년엔 무리한 인신구속을 방지하기 위한 범죄수사 규범을 제정했다.
또 58년엔 인신취급규칙을 새로 만들어 「증거주의 수사원칙」을 천명했고 명백한 인권침해를 한 경관은 엄벌위주로 처리했다.
인권보호문제에 관한한 일본경찰이 모델로 삼아 끊임없이 제도와 관행을 배운 나라는 영국이었다.
취재팀이 영국 뉴포트경찰서를 찾은 날 아침 19세된 이스티 후퍼군이 차량절도 혐의로 체포돼왔다. 후퍼군을 연행한 경관은 우리나라 당직사령쯤 되는 유치구류담당 상관에게 연행한 이유와 일시·장소 등을 10여분에 걸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유치구류담당은 이어 후퍼군에게 10여분간 피의자 권리를 설명해주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료 법률상담이나 변호사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가족 등 외부에 연락할 수 있다』는 등.
영장없는 체포와 수사권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 경찰. 그러나 영국 경찰은 피의자를 체포한뒤 작성하는 연행보고서에만 10여군데에 피의자 서명을 받도록 돼있다.
피의자가 권리를 설명받았다는 확인,지금 변호사를 부르겠다거나 부르지 않겠다는 확인,소지품 확인 등…. 이런 서명들은 기소후 불법수사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들이다.
연행보고서 뒷면에는 피의자가 몇시 몇분에 체조를 했고 약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등 담당경관의 관찰기록이 서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다. 피의자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일일이 채증한 것이다.
판사가 보석여부를 판단하기전 피의자의 연행조사시간은 24시간밖에 없다. 이중 최소한 8시간은 수면시간으로 보장해주어야 하고 2시간마다 반드시 휴식시간을 주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인권침해가 인정되면 경찰 수사의 증거능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피의자 조사는 전과정이 테이프에 녹음된다.
한 간부는 조사중 영국 경관이 지켜야할 여러가지 주의사항중 하나를 소개했다.
『녹음기가 작동되면 수사관은 법관이 조사과정을 보지 않고 듣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피의자가 흥분해서 주먹으로 책상을 「퍽」하고 내리치면 수사관은 「피의자가 책상을 내리쳤다」고 재빨리 당시 상황을 스포츠 중계하듯 설명해 녹음기에 담아야만 폭행시비를 면할 수 있지요.』
피의자 기본권 보장은 시혜가 아니라 의무라는 확고한 개념이 영국 경찰엔 자리잡고 있다. 기본권을 존중하는 선진경찰의 자세는 피의자 못지 않게 피해자의 인권존중에서 더욱 돋보인다.
범죄 피해자의 원만한 사회복귀를 돕는 것은 범죄수사를 통해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런던의 수도경찰청은 2천여명의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전담경관을 두고 있고 25개의 아동보호팀을 운영하고 있다. 48개 가정폭력 전담기구도 설치하고 있다.
범죄 피해자 전담 경찰은 정신적 불안정과 사회에 대한 불신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이 찾아 상담을 통해 안정을 되찾아주고 법적 구제절차를 돕는 것이 주요 임무다.
이들에겐 전문교육을 받은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붙어 있다.
자원봉사자중엔 상당수가 범죄피해를 당한뒤 경찰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경찰과 유대를 맺은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도움은 구체적이고 절실하다.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영국 모든 경찰서는 안쪽에선 유리창,바깥쪽에선 거울로 된 피해자 진술실을 마련해놓고 있다. 12세 이하의 어린이 피해자 증언은 폐쇄회로 TV를 통해 듣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영국생활 3년째인 조용철씨(33)는 『한국 교민들이 이국생활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에 다녀올 때면 「영국에서 사는 맛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고 말한다.
결국 「99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시민을 범인으로 몰지 않는다」는 정신이 수사 일선에서는 지켜볼 때 선진경찰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경찰 임의동행 편법연행·조사관행화
우리나라 경찰이 수사단계에서 가장 애를 먹는 것은 현행범이 아닌 피의자(용의자)의 소환 또는 연행조사다. 경찰에 체포권이 없기 때문에 임의동행을 빙자해 강제연행하는 편법을 구사해왔다.
그러나 임의동행 요구는 상대가 거절하면 연행을 강제할 수 없다.
또 임의동행에 응할 경우에도 6시간 이내에 조사를 마치도록 규정돼있다. 때문에 경찰이 6시간 이상 붙들고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법관행이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일단 피의자를 연행하면 48시간동안 철야조사를 강행,사후 구속영장을 받아내 법적근거를 보강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검찰과 법원도 용의단계에서 강제수사권이 없는 경찰의 현실을 감안,편법적 관행을 눈감아주고 있다.
우리에게도 묵비권 등 피의자의 권리를 사전에 알려줘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상의 규정은 있다.
그러나 경찰은 통상 피의자 신문조사를 다 꾸민뒤 서명날인받을 단계에서 그런 사실을 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파행의 배경에는 내사가 충분하지 못한 사건을 진술에 의존해 수사하는 경향 때문이다.
요즘 와서는 변호사의 피의자 접견 등 조력권이 경찰에 의해 침해당했다는 시비가 부쩍 늘고 있다. 결국 피의자의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긴급 구속요건을 완화하든,아니면 경찰의 수준을 높여 체포권이 인정되든간에 수사관행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각종 법규정이 피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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