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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참을성 많아진 귀성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달리기보다 서있는 시간이 많았던 교통지옥의 17시간.
회사원 柳珽植씨(34)의 이번 귀성은 차라리 머나먼 고행이었다.그러나 비록 지루하기는 했어도 짜증은 나지않는 상큼한 고향길이었다.
갓길에서 끼어드는 얌체도,창밖으로 쓰레기를 던지는 무치도,단속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성급함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설렘과 그리움으로 고향 전주를 향한 8일 오후2시30분.
한남대교와 양재동까지 그런대로 빠지던 차량행렬이 판교를 눈앞에두고는 예상대로(?) 가다서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툭 터진 4차선대로가 일순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승용차 한대 정도는 넉넉한갓길에는 달리는 차량이 없었다.
곳곳마다 눈을 부릅뜬 장승처럼 선 「갓길운행 금지」「범칙금 3만원,면허정지 30일」이란 입간판과 전광판이 무섭기 때문만은아니었을 것이다.궁내동 톨게이트와 수원을 지나 기흥을 통과할 무렵에는 어느덧 저녁.도로 중간중간에서 때를 기 다렸다는 듯이교통체증의 지표인 오징어.밀감.김밥장수들이 손가락 두개를 펴보이지만 사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이미 체증에 대비해 집에서부터 먹거리와 음료를 준비해온 것이다.때문에 오징어등을 사느라 앞차와의 거리가 떨어질 필요도 없었 고,1분이라도 빨리 가고픈뒷차가 짜증섞인 경적음을 낼 이유도 없었다.
천안삼거리부터는 가랑비가 시작되더니 남이분기점에서는 눈발이 날리면서 도로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피로에 지친 운전자들이 차밖으로 나와 맨손체조를 하거나 깜박조는 바람에 흐름이 끊겨도 뒷차는 참을성을 보였으며,왼쪽차선 혹은 오른쪽차선의 흐름이 빠르다고 슬몃 끼어드는 일도 없었다.
노숙하는 차량의 주변에는 지난해 추석때와 같은 우유팩.비닐봉지더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2천6백만명이 고향을 찾은 민족의 대이동.지역에 따라 하루 24시간도 넘게 걸렸던 귀성.귀경길.하지만 한층 성숙해진 운전문화속에 지루하기는 해도 짜증은 없었다.다만 이같은 자원.시간.국력낭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 을까하는 걱정만 한자락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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