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62.6.29선언 전두환.노태우 밀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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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7년 당시 盧泰愚民正黨대표의 고뇌에 찬 결단으로 기록되었던6.29선언이 全斗煥대통령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얘기는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진실이「全斗煥 주도론」이든「盧泰愚역할 독점론」이든 관계없이 6.29선언은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만큼 극적이었다.물론 아직도 6.29를 6.10항쟁의 필연적 부산물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제 당시 드라마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도 서서히 입을 열기시작하고 있다.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全씨가 대통령직선제와金大中씨 사면이라는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내 연출했고 盧씨가 중간에 참여해 시나리오를 짜는데 부분적으로 기여 했음을 알 수 있다.물론 주연배우는 盧씨였으며 朴哲彦안기부장특보 팀이 선언문의 실무작업을 했고 李丙琪당대표보좌역의 역할이 약간 있었다.
全대통령측에서는 막판에 큰아들 宰國씨가 참여했고 李鍾律청와대대변인과 金聲翊공보비서관이 실무작업을 도왔다.그리고 시나리오와별도로 金容甲 청와대 민정수석이 黨政간에 직선제 분위기를 돋우는데 약간 기여했다.李萬燮국민당총재가 그무렵 全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직선제를 권유한 것도 사실이었다.
87년6월27일 토요일 오후2시 청와대 별관-.全대통령과 盧泰愚 民正黨대표는 이틀후「결행」할 6.29선언문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그 자리에서 盧대표는 대통령직선제.金大中씨 사면을 골자로 한 선언문안을 읽었다.제목은「국민대화합과 위 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
선언문을 읽은 盧대표는『시위가 가라앉고 있습니다』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全대통령도『치안본부장(權福慶)에게民憲國의 데모를초동단계에서 진압하라고 했는데 조용하게 끝날것 같군.그렇게만 되면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될거야』라고 했다.
全대통령은 일을 추진하면서 늘『야당.재야의 데모로 우리가 밀리고 있을때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항복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상황이 시끄러우면 발표 시기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해왔다.
때문에 이날 시위가 가라앉은 것은 두사람의 입장에 서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두 사람간에는 상황이 어려워질 때의 대책까지 서있었다.
『발표하라고 할때 하시오.만약 발표 직전에 다시 시끄러워지거나 무슨 문제가 있으면「큰애」를 메신저로 보내겠소.아무런 연락이 없으면「원안」대로 하는 걸로 아시오』라는 것이 全대통령의 복안이었다.
「큰애」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온 全대통령의 큰아들 宰國씨로 이자리에 혼자 배석했다.「원안」은 29일 盧대표의 선언발표→민정당의원총회→대통령에게 건의→국무회의→국정자문회의→全대통령의 선언수용 특별담화로 이어지게 되어있었다.宰 國씨는 미국에서 4.13호헌의 불공정성에 대해 全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宰國씨의 회고.
『서울에 와보니 아버님이 국면전환 구상을 거의 끝내놓으셨더군요.두분은 이미 여러차례 만나 대강을 협의했기 때문인지 27일마지막 회동은 짧게 끝났습니다.』 두사람은 최종 순간까지 6.
29를 비밀에 부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회동도 청와대본관과 떨어진 별관에서 했으며 盧대표는 중앙청 서문에서 全대통령이 보낸 청와대 차량으로 바꿔타거나 아예 집에서 청와대 차를타고 왔다.경찰1 01경비단이 청와대를 출입하는 차량의 번호판을 체크,정보를 올리기 때문에 그것마저 피하기 위해서였다.27일 회동을 끝내고 비로소 盧대표가 安武赫안기부장에게 알려줄 정도로 철저한 보안이 지켜졌다.
6월2일 全대통령이「盧대표 후계」를 공식화한뒤 6.29가 있기까지의 27일간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사실 6월2일 밤 연희1동 자택에 돌아온 盧대표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그날밤 盧대표는『이것은「하늘의 조화 」「하늘의 운명」』이라며 후계자가 된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그는『대통령각하께서「盧대표밖에 없다」고 할때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메고몸둘 바를 모르겠더군요』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2일 밤 民正黨중앙집행위원들이 참석한 청와대내 상춘재 만찬에서 黨총재인 全대통령은『평생동지 盧대표의 인품과 지도력에 비추어 평화적 정권교체와 올림픽등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했었다.그날밤 盧대표는 기자를 만나『이제 이것이 피할수 없는「운명」일진대 신명을 바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후계 지명은 곧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6월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4.13호헌 철폐와 6.10전당대회 취소를 요구하는 장외투쟁이 곧 전국적으로 번져갔다.盧대표는 같은날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 령후보로 선출됐다.그러나 그날저녁 서울 힐튼호텔에서 있은 축하리셉션은 최루탄가스속에서 치르지 않을수 없었다.사태의 심각성을 목격한 全대통령은 상황전환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위기에 부닥쳤을때 국면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全대통령의 장기 이기도 했다.당시全대통령의 순발력에 대한 청와대비서관출신 Q씨의 설명.
『全대통령의 상황대처 자세를 엿볼수 있는 일화중엔 이런 예가있습니다.73년 尹必鏞사건으로 하나회가 된서리를 맞고난 직후 수경사 포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손아래 동서 金相球중령이 張泰玩참모장과 砲배치문제로 충돌해 예편당할 처지에 있 었지요.그때 金중령의 구명문제가 거론되자 全준장은 이렇게 설명했죠.「그를 구하려면 朴正熙대통령에게 사정을 얘기해 부탁해야하고 그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지금 전전육군에서는 하나회의 재기 가능성 차원에서 내가 朴대통령과 통하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내가 朴대통령과 통하는 것이 확인되면 모두 우리를 다시 경계할 것이다」.그래서 지금은 자중할 때라는 거였죠.결국 그는하나회를 살리기 위해 동서의 예편문제를 방관하다시피 했지요.6.29도 全대통령이 아 니면 발상조차 못했을 겁니다.그후의 盧대통령 성격과 리더십을 보세요.盧대통령이 그런 결단을 내릴수 있는 사람입니까.』 Q씨의 이어지는 회고.
『물론 민심의 실체를 파악하고 수용한데는 金大中씨를 풀어주고야당이 단합하기 어렵게 정국을 몰아가면 직선제를 해도 이길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지요.』 全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가 여당에 거꾸로 불리할수 있다는 얘기를 85년말 洪璡基씨(86년 작고.前中央日報회장)로부터 듣고 86년말 한때 직선제를 검토한적이 있었다고 한다.洪씨는 대통령이 아닌 여당후보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야당후보가 간선으로 대결하면 여당후보가 유신시절 統代때처럼 유리하지 않으며,선거자금 지원도 간단치 않을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바 있다는 것이다.
***15일 첫 구상밝혀 이 얘기는 張世東前안기부장이 93년11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으로 재판받는 과정에서『86년10월부터 그해 말까지 정부 내에서는 직선제개헌안을 수용하고 모든 정치적 제한 조치를 해제해 선거를 통해 국민 심판을 받는 방안을 검토 한바 있다』고 한 주장과 맥락이 닿는다.당시 여야합의개헌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張부장은 全대통령에게 개헌 강행이불가능하다고 보고했으며 全대통령은 고위당정회의에서『합의개헌이나내각제로의 일방개헌이 어렵다면 직선제도 생각해보자』고 했 다는것이다. 그러나 민정당측에서『합의개헌을 위해 좀더 시간을 달라』고 해 그냥 넘겼고 87년 들어 4.13 호헌조치로 全대통령은 방향을 거꾸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全대통령은 직선제로 의외로 빨리 발상전환을 할수 있었다고 측근들은 주장하고 있다.
全대통령이 직선제로 선회할것을 결심하고 盧대표에게 처음 입을연 것은 6월15일이었고 구체적으로 구상을 털어놓은 것은 17일과 19일이었다.全대통령의 구상을 듣고 盧대표가 처음에 신중을 기했다고 그의 주변에서는 얘기하고 있지만 실 은 그가 강한거부감을 표시했다고 한다.『어제까지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해놓고….金大中씨를 풀어놓고 정권 재창출이 되겠는가….현행 헌법으로 하면 되는데 굳이 왜 직선제인가』라고 盧대표가 반발했다는 것이 全씨측의 설명이다.
盧대표가 처음 주춤했다는 것은 여러 경로로 확인된다.당시 李載灐국회의장(작고)이 생전에 민자당의원 Z씨에게 회고했다는 내용도 그중의 하나.Z씨의 증언.
『6월18일께 盧대표가 李載灐의장을 찾아와「全대통령이 직선제를 받으라고 했다」는 얘기를 털어 놓은뒤 직선제로는 당선이 어려울지 모른다고 걱정했답니다.그러면서 李의장에게 全대통령을 만나 마음을 바꾸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이에 李의장은 난색을 표하고 거꾸로 盧대표를 설득했다고 해요.
李의장은 「나도 과거에 야당과 민주화투쟁을 한 사람이다.내 마음에도 직선제가 있다」면서「직선제하면 이길수 있다」고 조언겸설득을 했답니다.』 李載灐의장의 도움말이 盧대표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줬는지는 알수 없다.다만 18일 盧대표가 자신의 개인참모역할을 하던 朴哲彦안기부장특보를 불러「직선제를 검토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린 것을 보면 어쩔수 없다고생각 했던듯 하다.朴특보의 盧대표참모역할은 張안기부장시절부터 묵시적 양해속에 해온것으로 이는 張부장의 盧대표에 대한 정치적배려였다는 것이다.盧대표가 27일 全대통령과 의논한 8개항의 문안은 바로 朴哲彦특보팀에서 만든 것이었다.
***盧대표 英雄만들기 盧대표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차츰 직선제가 꼭 死地만은 아님을 인식했고 朴哲彦팀의 검토보고도 직선제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쪽이었다고 한다.사정이 그렇게되자 청와대와 盧대표참모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선언문 의 구성과 작성,현충사.국립묘지참배등을 착착 준비했다.
盧대표는 그같은 각본을 멋지게 자신의 작품인양 소화했다.일단 시나리오가 쓰여지면 각본대로 연기를 해내는 것은 盧대표의 장기이기도 했다.
물론 盧대표가 처음 주춤한것은 단순히 선거불리측면만은 아닐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그것은 살얼음 위를 걸어온 2人者로서 각고의 처세끝에 후계고지에 다다랐는데 그것을 포기하라는 데서 오는 상실감때문이라는 것이다.
『盧대표가 처음 미지근한데는 모험에 대한 불안감이 우선 컸겠지요. 직선제는 결코 그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그러나盧대표는 12.12와 5.17과정에서의 역할로 쌓은 5共창업의「持分」을 빼앗기지 않나하는 박탈감도 적지않았을 거예요.
全대통령 자기는 체육관 선거로 공짜로 대통령을 해먹고 나만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불만같은 것이 있었을 겁니다.국면전환의 불가피성을 느끼면서도 혹시 全대통령이 자신의 위상을 흔들어놓지않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겠지요.』(Z씨) 또 시위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격렬해지던 19일,全대통령의 軍출동준비명령도 심리적으로 盧대표에게 직선제 수용결심을 재촉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비상조치는 자신을 포함한 정치권의 전면「싹쓸이」로 이어질수 있다는 것을 5共핵심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盧대표는 20일 이후 全대통령으로부터 직선대통령이 될수 있게끔「발가벗고 밀어준다」는 약속을 누차 받았다.全대통령은 盧대표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후보대열 가지치기 全대통령이 후계문제의「교통정리」에 나선 것은 4.13조치에 따른「체육관 선거」구도를 마음속에 굳힌2월말께였다.
宰國씨는「교통정리」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갖고있다.『처음부터 아버님은 盧대표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셨지요.張부장은 결코 盧대표와 후계문제를 다투지 않았습니다.교통정리라는 말은 제가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87년 2월말 청와대 만찬자리에서 全대통령은 盧대표에게『당대표가 책임지고 정국을운영하라.내가 당신을 돕겠다』고 했고 張부장을 따로 불러『안기부장도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정국을 운영하라.盧대표를 잘 모셔라』고 지시했다.
全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민정당간부들을 청와대에 불러 공개적으로 盧대표에게 정국운영권을 주겠다고 밝힌 3월25일 청와대만찬 한달전이었다.
한때 후계대열로 거론됐던 朴俊炳의원은 5월 국회상임위원장 교체때 보사위원장으로 임명해 가지치기해주었고 내각제 가능성이 없어진 상황에서 민간인출신 盧信永씨는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그런 점에서 6.29는 5共세력의 재집권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한때 盧씨의 전유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5共청산의 열기속에 全.盧두사람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6.29는본질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6.29선언을 영원히 盧대표의 작품으로 남기기로 두사람이 특별히 약속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全씨는 6共 정부가 자리를 잡은뒤 6.29선언 과정에서자신의 역할이 있었음을 흘려줄 것으로 기대하고 그 영광을 흔쾌히 盧대통령에게 돌렸던 것으로 보인다.그런 점에서 6.29는 全.盧 두사람의 퍼스낼리티를 드러내면서 사연많은 愛憎을 표현하고 있는듯 하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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