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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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1부 불타는 바다 탈출(29) 명국은 윤씨 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렇지.일이라는 게 순서가 있지.명국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지금 벌이려는 짓이라는게 이게 영 순서가 아니라는생각이 드는 건 뭔가.
『만만한 데 말뚝 박는 거여.순서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순서.목마른 놈이 샘 파는 거고 다 그런 거지,어느 세월에 때 기다리고 순서 찾고,앗따 그러느니 오뉴월 늘어진 쇠부랄 떨어지길기다리지.이 사람이 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거 모르듯 허네.』 『헌다고 다 말인가.』 『아니면?』 『탄 캐러 왔으면 탄 잘 캐는 놈이 장원인 거여.물에 들어갔으면 헤엄 잘 치는 놈이 장원이고.』 『이 바닥에 와서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는 거지.다 도토리 키재기지.나라고 해서 노무계 심부름 못 할게 어디 있어.시켜만 보라지,뭐가 못 나서 정승 판서라고 못할까.
』 『그게 아닐세.힘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여기 와서 지낸 밥그릇으로 봐도 그렇지.자네가 나설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징용자들을 다루기 위해 조선사람 가운데서 조장도 뽑고 반장도 뽑아 놓고 있었는데,그 심부름 하는 일을 두고 서로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였다.명국은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길남이 들어와 문앞에 쪼그리고 앉는 것이 보였다.
『내 말은 자네가 그렇게 설쳐댄다고 뭐 따로 될 일도 없다 그말이네.』 윤씨의 말에 조가가 발칵 화를 냈다.
『자네 낮에 한 말은 뭐여,그럼.』 『낮에라니.그거야,우리 조선 사람끼리 마음을 모아야 한다.내가 그 말밖에 더했나.』 『마파람에 돼지 불알 놀듯 하네.』 『이 사람은 어떻게 된 것이 불알 빼고 나면 말을 못하는군 그래.』 옆에 앉았던 김씨가보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눈을 부라리며 김씨를 훑어보고 나서 조가가 한마디 했다.
『그렇수.난 그거 밖에 아는 게 없수.』 『누가 뭐라나.이치가 원래 그런 거지.글 못한 놈이 붓 고르는 거여.』 『뉘 아니라나.선무당이 장구 탓이나 하는 거지.』 명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방을 나서는 그를 길남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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