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31.77년 청각장애 서울대 낙방 박창권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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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7년 전,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청각장애」라는 이유만으로서울大 입학을 거절당한 소년이 있었다.그 소년은 그후 다른 대학에 거뜬히 합격해 우등으로 졸업했다.몇년 뒤에는 설움을 안겨주었던 서울대의 대학원에 입학해 당당히 졸업함 으로써 눈물겨운역전극을 펼쳐보였다.
「人間증명」의 주인공 朴彰權씨(37.시원종합건축사사무소장)는지금 중견 건축사로 활약중이다.
朴씨는 바로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크게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로 심한 청각장애인이다.설상가상으로 말도 전혀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朴씨와의 인터뷰는 시종 筆談으로 이루어졌다.그의 글씨 속도는 대단히 빠르고 달필인데다 표현이 명료하 다.
77년 동대부고를 졸업한 朴씨는 그해 입시에서 서울大 미대 응용미술과를 지망했다.본고사에 앞서 치른 예비고사(당시) 성적은 2백67점으로 공과대 합격도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청각장애라는 약점때문에 일부러 미대를 택했다.후에 알아 본 입학시험 성적은 지원자중 2등.
그러나 대학 당국은 입시요강의 규정을 들어 그를 불합격시켰다.듣거나 말하지 못하므로 4년간 공부할 능력이 없다고 판정한 것이다. 서울大에는 물론,청와대에도 탄원을 거듭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음 해인 78년에는 거의 오기로 서울大공대에 다시 도전했다.그러나 입시요강이 달라지지 않은만큼 결과는 똑같이 낙방.
후기였던 한양大 건축과에 응시한 결과 다행히 입학허가가 났다.이를 악물고 공부한 朴씨는 정상 학생들 틈에서 두각을 나타내우등으로 졸업했다.
82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朴씨는 공간연구소에 공채로 입사해故金壽根씨 밑에서 건축실무를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2년 뒤에는 서울大 환경대학원에 뜻을 두고 원서를 냈다.
『대학원 입학 때도 77년과 비슷한 상황이 재현됐어요.내가 그동안 겪은 일과 실무경력,앞으로의 계획 등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지요.다행히 교수회의에서 입학을 허락해 주더군요.』 그는 고교.대학시절과 마찬가지로 대학원에서도 일반 학생과 똑같은 여건에서 수업을 받았다.장애인이라 해서 특별히 지도받은 적이 없었고 가정형편상 과외지도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을까.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노력과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朴씨 본인은 『입과 귀가 없는 상태에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애썼다』고 회고한다.
84년 도시설계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86년부터는(주)아키플랜 종합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 大田엑스포아파트 설계현상공모에 공동당선하는 등 전문설계인으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쌓았다. 91년에는 건축사 면허를 땄고 다음해 현재의 시원건축사사무소의 소장으로 독립에 성공했다.
그동안 건축설계.주거설계.도시설계 등 안해본 분야가 없을 정도.『이 땅의 환경을 책임질 수 있는 건축가로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서로 공존하는 보다 살기좋은 환경을 창조하는 일을 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朴씨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 보자』고 후배 장애인들에 당부했다.
〈盧在賢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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