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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화운동에 한평생-18일 타계 문익환목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18일 他界한 文益煥목사는 한국 재야운동의 큰 별이었다.6차례의 옥살이,10년여에 걸친 투옥경력이 말해주듯 文목사는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던 재야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文목사는 1918년6월1일 만주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아버지 文在麟목사와 어머니 金信默권사의 3남2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정이 움트던 이곳에서 마을주민들이 세운 공동체 학교 은진중학에 민족시인 尹東柱,독립운동가 宋夢奎와 함께 수학했던 소년 文益煥은 어려서부터 저항정신을 깊이 간직하게된다. 일본 東京에서 신학공부를 하던중 요코하마 여자신학교 졸업생인 朴容吉씨를 만나 결혼한 文목사는 만주에서 한인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던중 해방을 맞아 46년 귀국했다.
해방이후 진보적 목사의 한사람에 불과했던 그는 친교가 깊었던張俊河씨가 75년8월 의문사를 당한뒤 열렬한 재야투사로 제2의인생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文목사는 張씨의 뒤를 이어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고 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에 金大中.李文永씨등과 함께 구속돼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77년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뒤 文목사는 국민연합선언서사건(78년),내란예비음모죄(80년),집시법위반(86년),국가보안법위반(89년)등 모두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 囹圄의 생활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채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민주통일 국민회의 의장.민통련 의장.전민련 고문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재야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文목사는 89년3월 평양을 방문,金日成을 만남으로써 사회전체를 통일논쟁으로 몰아넣었고『감상적 통일지상주의자』『통일운동의 화신』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했다.귀국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7년형을 선고받았고 투옥도중 노모를 여의는 시련을 겪은뒤 지난해 3월 특별감형으로 석방됐다.
『꿈을 비는 마음』등 여러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냈고 시인으로불리는걸 좋아했던 文목사는 日帝와 분단,군사정권의 탄압등 현대사의 온갖 굴곡속에서 어린애같은 순수함과 청년의 열정을 간직한채 투쟁으로 일관하다 이제 역사속으로 영원히 잠들게 된 것이다. 〈金鍾赫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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