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소설>최윤 속삭임속삭임.윤후명 별을사랑하는마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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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윤씨의 단편소설「속삭임,속삭임」(『한국문학』11,12월호)은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이 작가의다른 여러 소설처럼 추억.회상의 형식을 지닌 작품이다.그 추억의 빛 속에 어떤 잊혀졌던 인물의 모습이 떠올려 진다.한 딸아이의 어머니인 화자의 성장기에 그늘이 되어주었던 과수원지기가 그 인물이다.소설이 이어져 나가면서,또 회상 속의 화자가 나이를 먹으면서,전쟁이 끝난뒤 반공포로로 어린날 화자의 가족 앞에나타나 성실한 일꾼이자 벗으로 살다 한평생을 마친 그「아재비」가 사실은 정치적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도망중인 사람이었음이밝혀진다.어린 시절의 무구한 세계는 어른들의 무섭고 슬픈 사연을 그 뒷면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그렇듯 무섭고 슬픈 것이며 그것만이 현실이라는 냉혹한 논리에 대해 그렇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은밀히 넘겨다보는 것,적어도 그 가능성에 대한 간절한 희원을 표현하는데에 이소설의 관심은 뻗어 있다고 여겨진다.자신의 기박 한 삶을 내색하지 않고 화자에게 극진한 사랑을 쏟아주었던 아재비,스스로는 반공인사이면서 아재비를 든든히 거두어준 화자의 아버지,그 두 사람이 밤새워 무언가를 속삭이는 다정한 정경의 묘사들을 독자는눈여겨볼수 있다.
그 삽화들은 서로 갈리고 나뉘면서 그때마다 수많은 상처를 남기는 우리의 삶이 속삭이듯 그렇게 화해로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일까라는 나직하지만 힘있는 물음을 실어온다.그 또한 속삭이듯 던져지는 이 물음은 소설의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딸에게속삭이는 화자의 애틋한 사랑의 말「숨어서 우는 사람의 눈물을 볼 줄아는」사랑의 삶에 대한 권고에 공명되면서 읽는이의 마음에한층 깊은 울림을 울린다.
윤후명씨의 중편「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현대문학』12월호)에도 다른 이의 삶의 비밀을 문득 엿보게 된 인물이 등장한다.알콜중독으로 폐쇄병동에 갇힌 처지의 화자가「비행기를 타고 북한을 방문했다는 망상」을 가진 여자와 만난다.미술 학도인 그 여자가 병동에서 그리는 비상하는 새의 이미지는 지상에 뿌리박을일만 바라고 살아온 화자에게 신선한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한다.
진실은 지상의 현실에 포획되지 않고 지금 이곳 밖의 현실에 대한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데 있다는 것 이 그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그것은「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작나무」의 이미지로상징화되어 있다.그 상징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향해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하는 작중인물들의 바람의 표현이면서 작가 자신이 지닌 문학관의 간 결한 요약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예토에서 하늘에 뿌리박은 자유로운 삶의 비상이 가당한 것인가.이윽고 회복되어 사회로 나간 여자가 전시회를 직전에 두고 다시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정은 그러한 비상의 꿈이 현실에서 필경 좌절당할 운명을 띤 것임을 알 려준다.하지만 그처럼 좌절할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데 바로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진정한 영광이 있을 터이다.문학과 예술의 그 괴로운 꿈꾸기를 통해 우리는현실에 붙박인 삶을 반성하고 아직 없 는,그러나 와야할 세상의모습을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도 두 작가를 따라 비록 낡았으나마 그리운 꿈 한자락을 다가오는 새해를 향해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새로운시간속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자작나무처럼 우거져 세상을 마침내 살만하게 만드는 꿈을! 손경목〈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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