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영어실력 짧아 애로/제네바협상 실무진들 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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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기내서 서류회람·출장보고서 작성 강행군/고물가로 출장비 부족·한방쓰기 불편 감수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막바지에 「계유 5적」이나 「허완용」이라고까지 욕을 먹고 있는 과천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심사는 편치 못하다.
제네바에서는 미국·유럽공동체(EC) 대표로부터 문전박대의 수모를 당하고 「쌀시장 개방 책임은 1차적으로 정부에서 져야 한다」는 정치권의 공세에 휘말려 힘이 쏙 빠지고 할 말을 잃은 분위기다.
그러나 협상에 한번이라도 참여했던 실무자들은 대부분 제네바행을 가장 피곤했던 출장으로 떠올리며 속으로는 협상 진행상황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협상팀이 현지에서 부닥치는 가장 큰 낭패는 우리측의 협상력 부족.
상대방은 대부분 86년부터 줄곧 UR협상을 맡아온 변호사 출신의 노련한 협상통들인 반면 우리는 3년씩 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자주 바뀌는 새 얼굴들.
그래서 부족한 국제법률 지식을 메우기 위해 나중에는 신희택변호사 등 국제법률에 밝은 민간 변호사들을 참관인 자격으로 대동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언어문제도 우리측 협상 실무진들을 괴롭힌 것중 하나.
수석대표를 맡으려면 능숙한 영어구사가 필수여서 경제부처마다 언어와 전문지식을 함께 지닌 적임자를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고,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실무자들은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겠더라』는 독백을 빠뜨리지 않았다.
○…「통상분야만큼은 국제법률·협상 히스토리(역사)·언어라는 3박자가 꼭 맞아야겠더라」는 경제부처 사이의 공감대는 올해초 경제기획원이 김태종사무관 등 사법고시 사법연수원 출신 2명과 외무고시 출신의 신승룡사무관 등을 스카우트한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 특채요원들은 모두 지난 10월 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때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친 장본인들. 관가에서는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제네바의 팽팽한 협상에서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제네바 출장은 1주일간의 협상준비를 위해 출발 열흘전부터 협상스케줄과 면담약속을 하고 밤을 새워 관련자료와 씨름하면서 협상절차를 사실상 시작. 또 비행기안에서는 서류회람과 실무자들끼리 호흡을 맞추어야 하고 워낙 관심이 쏠린 협상이니 만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출장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는 것.
사무관이나 과장급 협상실무자들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인쇄소에 맡긴 보고서를 들고 다음날 정상적인 출근을 해야했다.
○…협상팀들은 출장비에 대해서도 대체로 유쾌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제네바는 유럽에서도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지만 정부 출장비 규정에는 「나」급 지역.
협상 실무자들은 『주로 봄·가을에 열리는 협상은 관광시즌과 맞물려 방잡기가 어렵고 물가는 살인적으로 뛰어올라 코너에 몰렸다』고 말한다.
공식 숙박비 1백달러로 버티지 못한 사무관들은 협상 막바지에 대부분 외국인의 눈치(?)를 피해 둘이서 한방을 쓰는 불편을 감수했다고. 협상팀이 자주 묵은 GATT 앞 허름한 몽레포 호텔이나 뮈뵌픽호텔의 종업원들은 이런 풍경에도 익숙해졌다.
○…UR협상이 과천 경제부처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공직자들의 국제화로 『해외여행 수백번보다 제네바 협상테이블에 한번 나가보면 그것이 진짜 국제화』라는 이야기.
협상대표들은 특히 쌀쌀맞은 표정의 독일출신 유럽공동체(EC) 밀러 대사로부터는 똑 부러지는 협상술과 송곳 하나 안들어 가는 국제협상의 냉혹함을 접했다. 「깡패」라는 별명의 제네바주재 뉴질랜드 공사는 자기 나라 이해가 조금이라도 밀린다 싶으면 국제외교관례와 상관없이 협상테이블에서 거침없이 과격한 언행으로 우리 대표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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