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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권력이양 군부안정 비장의 카드 정호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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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권력의 창업동지는 권력해체기엔 흩어지기 쉽다.대권을 향할때 맺은 의리도 곧잘 배신의 허망함으로 변한다.권력의 열매가 없어지면 어제의 동지가 적으로 변하기도 한다.그래서 정치엔 영원한적도,동지도 없다고 말한다.
全斗煥.盧泰愚 전직대통령과 鄭鎬溶씨(現민자당의원)의 육사11기출신 3인이 보인 인간관계의 단면등은 권력의 속성을 읽을 수있는 하나의 사례로 꼽힐만 하다.
이들 3자관계는 5,6共을 통해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며 정치의 냉혹성과 추잡한 일면을 여지없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7월12일 저녁 청와대집무실-.全대통령 책상 위에는 「親展」이라고 쓰여진 한장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편지는 정국운영의 책임을 맡겨준데 대해 감사함을 정중히 표시하고 정권재창출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절절한 다짐으로 서두 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국정의 마무리,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軍의안정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그런 차원에서 국방장관은 鄭鎬溶동지를 적임자로 생각합니다』라는 간곡한 건의로 마무리지었다.
全대통령은 편지를 다시 한번 읽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음날 李基百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그동안 수고 많았다.정국의 국면 전환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경질 통보를 했다.14일 全대통령은 개각 을 단행했다. 金貞烈총리를 기용한 개각에서 가장 주목을 끈 대목은 鄭鎬溶국방장관의 등장이었다.내무장관을 그만둔지 50일만에 그가 다시국방장관에 복귀한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6.29선언 직전 軍출동설.친위쿠데타설등으로 홍역을 치른 정치권은 鄭 장관의 등장으로 다소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듯 했다.
全대통령에게 鄭장관을 건의한 편지의 주인공은 盧泰愚민정당 대통령후보였다.6월10일 민정당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가 되고 명실상부한 5共의 2인자로 자리를 굳힌 盧후보는 왜 鄭장관을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국방장관에 천거한 것일까.
이에 대해선 몇가지 해석이 있었다.첫째는 직접 건의할 시간이없었다는 것이다.12일 오후 李漢基총리의 경질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盧후보는 즉각 국방에 鄭장관을 앉혀야겠다고 결심하고 13일 오전 청와대에 면담을 요청했다.그러나 全대통 령은 마침 다른 일정이 잡혀 있었다.그래서 그날밤 부랴부랴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통령후보가 되었지만 철저히 全대통령을 모신다는 제스처로 편지를 택했다는 것이다.
盧후보는 鄭장관에 대한 全대통령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것을 알고 있었다.때문에 다른 장관도 아닌 軍통수권과 연결된 국방장관에 鄭을 자칫 잘못 밀다가는 全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었다.그래서 위험 분산의 측면에서 간접 건의를 택했다는 얘기다.盧후보는 全대통령 면전에서 좀처럼 심기를 건드리는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盧후보는 왜 위험부담을 안고 鄭을 천거한 것일까.6월항쟁의 와중에서 軍의 출동과 비상조치 움직임은 金泳三.金大中씨 진영 못지않게 盧泰愚진영에도 충격을 주었었다.軍출동은 기존 정치권의싹쓸이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노심초 사 가꿔온 후계자의 길이 엉망이 될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盧후보로서는 全대통령 곁에서 軍을 장악해줄 인물이 필요했고 慶北高 동기인 鄭鎬溶은 그런 면에서 믿음직했다.
鄭의원 자신도 당시『盧대표가 軍문제에 관해 누군가 든든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全대통령에게 지위를 걸고 나를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밝힌바 있다.그는『全대통령이 나에 대해 다소의 오해 때문에 그런 시국에 국방을 맡기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지위를 걸었다」는 鄭씨의 표현대로 盧후보로서는 그 인사건의가 하나의 모험이었다.
盧후보가 全대통령에게「서면 진언」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것은 그때가 두번째였다.82년 張玲子사기사건으로 온통 시끄러울때 5共공신들이 全대통령 모르게 극비의 회동을 가진적이 있었다. 兪學聖안기부장.盧泰愚내무.黃永時육참총장.車圭憲2군.鄭鎬溶3군사령관.白雲澤1군단장.朴俊炳보안.崔世昌수경사령관.安武赫국세청장.鄭棹永보안사참모장.許和平정무1.許三守사정수석등은 全대통령 친인척들의 공직사퇴 건의를 결의했었다.일행은 그것을 盧내무로 하여금 全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기로 했었다.그러나 盧내무는「청와대 獨對건의」를 하지않고 편지를 써 우회적으로 전달했다.全과盧사이의 관계와 盧의 스타일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수 있다. 어쨌든 개각으로 全斗煥대통령-盧泰愚민정당대통령후보-鄭鎬溶국방장관의 3자관계는 87년후반 권력이양기의 안정축이었다.張世東안기부장이 빠진 권력내부 힘의 공백은 3각관계의 큰 틀에 의해 움직였다.
임기말 이같은 3각관계를 구축케한 발단은 朴鍾哲사건이었다.민주화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한 87년1월 朴鍾哲고문치사사건은 5共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全대통령은 金宗鎬내무장관과 姜玟昌치안본부장을 문책해 급한 불을 끄려했다.내무장관과 치 안본부장이 동시에 문책당한 것은 건국이후 처음이었다.그랬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점점 더 확산돼 갔다.1월21일 내무장관에 鄭鎬溶前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됐다.
鄭내무는「朴鍾哲 정국」의 소방수격으로 등장했다.全대통령이「비장의 카드」를 썼다는 해석과 함께 야당도 5共 거물의 출현을 주목했다.무엇보다 全대통령과 鄭鎬溶씨 관계가 서먹서먹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難局 소방수役으로 둘의 관계가 벌어진 것은 86년1월 국방장관 인사 때문이었다.85년12월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끝낸鄭씨는 내심 국방장관을 기대했으며 소문도 그런식으로 났었다.高明昇보안사령관이나 安賢泰경호실장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그런데全대통령 은 느닷없이 李基百前합참의장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鄭씨는 허탈하고 섭섭했다.그는『육군책임자의 임기 2년은 너무 짧고 軍전력유지상 바람직하지 않다』며 참모총장임기를 3년으로 못박도록 軍인사법을 고쳐 朴熙道대장에게 총장을 넘기고 나왔다 .
그렇게 해주면 軍내부가 의견을 모아 자기를 국방장관에 밀어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全대통령은 鄭鎬溶이 예편해 바로 정치적 자리인 국방장관을 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쉬게 했다.충격을 받은 鄭은「내가 무얼 잘못 했기에 물을 먹이느냐」고 불만을터뜨리기도 했다.
그 이후 全대통령은 鄭씨에 대해『버릇을 고치겠다』는 태도로 대했다.鄭이 부탁한 K모 소장을 일부러 진급에서 누락시켰다.통상 중장으로 올라가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鄭이 부탁하는 바람에오히려 명단에서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다.鄭씨는 全대통령의 눈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그런 鄭씨가 내무장관에 기용된 것은 관심일 수밖에 없었다.82년 宜寧 경찰관 총기난동사건때 盧泰愚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졌다.全대통령은 어떤 의도로 鄭씨를 다시 썼을까.民自黨의원 T씨의 증언.
『全대통령은 퇴임후의 문제를 생각한 것이죠.5共 창설과정에서같이 고생한 처지의 사람끼리「같이 책임지자」는 뜻이었지요.87년들어 全대통령은 퇴임후 5.18 광주문제가 거론될 것에 늘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퇴임후 자기한테 날아올 돌팔매질이 걱정이었고 방패막이 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요.光州사태 당시 공수부대의 역할로 보아 특전사령관이었던 鄭씨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해 있으면 자기 살기 위해서라도 바람막이를 해줄 것 아니냐는 판단이었지요.이리저리 잰 끝에 결 국 12.12를 같이 한盧씨를 후계자로 임명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鄭을 발탁했지요.』***특급 보안속 기용 鄭씨의 내무장관 임명때도 盧대표는 영향력을 발휘했다.鄭의원은『黨에서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이 점에 대해 당시 民正黨고문인 權翊鉉의원도 동의하고 있다.盧대표는 왜 중요 고비에서 鄭씨를 추천했을까.T씨의 해석.
『우선 張世東안기부장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盧씨에겐 무엇보다 필요했을 겁니다.또 선거를 의식한 내무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컸었지요.盧씨는 내무장관시절 내무관료들의 얘기에 세뇌되어 있었지요.선거에서 시장.군수들의 역할을 과대평가 하곤 했지요.시골출신 국회의원들은 시장.군수가 없으면 선거에서 이기기 힘든 것으로 알던 시절이었으니까요.직선이든 간선이든 대통령선거를 겨냥해 내무장관에 믿는 사람을 앉힌다는 점에서 鄭씨를 생각한 것이지요.』 鄭씨의 내무장관 기용은 張世東안기부장도 모른 특급 보안속에서 이루어졌다.張부장은『내가 알았으면 각하에게 건의해 내무장관이 되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고 분해했다고 한다.
張부장의 鄭씨에 대한 거부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경호실장시절 鄭씨가 全대통령에게「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놓고는 담배를 먼저 꺼내물거나 다리를 먼저 꼬고 앉는 것등을 무척 싫어했다.鄭과 張 두사람은 근본적으로 체질이 맞지 않았었다.全대통령이 정규육사의 맏형을 자부하며 악착같이 군대생활을 해온데 비해 鄭은 좋은 의미에서 여유있었지만 나쁘게 보면 농땡이였다.全대통령과 달리 비교적 넉넉한 집안 출신인 鄭씨는 소령때 군대생활을 그만두려 했었다.79년 그는 전방사단장을 맡은 동기생들보다는 처져 한직인 대구 50 사단장을 맡아 군대생활을마감할 궁리를 했었다.12.12의 긴박한 상황때도 鄭씨는 빠졌다.모범생型인 張世東은 비록 선배이긴 하지만 이같은 鄭씨에게 불만이 많았었다.
그러나 鄭씨의 느슨한 매너는 全대통령의 권위에 꼼짝못하던 시절 육사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따르는 후배가 꽤 있었다.때로는 격식을 무시하는 자세가 배짱과 소신으로 비치기도했다. ***張독주 반발 불러 내무장관으로서 鄭씨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全대통령이 정국운영의 전권을 거의 張世東부장에게 맡겼기 때문이다.그러나 임기말이 가까워올수록 黨政 일각에서는 張부장의 독주에 반발이 생기기 시작했다.張부장에게 꼼짝못하던 청와대비서실로부 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金容甲민정수석은 張부장이 건드리지 못한 친인척문제에 소신있는진언을 했다.金수석은 李春九.安武赫과 손잡고 張부장의 立地를 넘보기 시작했다.
이런가운데 朴鍾哲사건 2彈인 축소은폐는 이 권력 구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5월23일 토요일 安家회의에서 鄭내무는 폭탄선언을 했다.『이 내각은 공신력을 상실한 내각이다.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내각총사퇴가 불가피하다.총리.안 기부장을 포함해 우리 모두 물러나자』며 동반퇴진론을 폈다.반면 張부장은『대폭 개각은 일을 더욱 크게 만들고 대통령에게 부담을 준다』며특유의 不忠논리로 신중론을 제기했다.
全대통령도 더이상 張을 감싸고 돌수 없는 상황이었다.鄭장관의물귀신작전으로 5월26일 盧信永총리와 張부장은 퇴진했다.鄭씨는盧泰愚후계체제를 구축하는데 一助하게 된 셈이었다.
지금와서 鄭의원은『결과적으로 盧대표를 도운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그러나 당시 권력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지 않고 있다.鄭장관과 盧대표 사이에 내각 총사퇴문제를 놓고 모종의 긴밀한얘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朴鍾哲사건으로 내무장관에 들어온후 그는 盧泰愚후계체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6월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軍출동을 막기 위해서도 그는 나름대로 뛰었다.비상사태 출동을 제어하는데 鄭장관의역할이 全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그 로 인해 盧대표와 더욱 의기투합해진 것만은 사실이다.6.29선언이후 全대통령은 盧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선거체제로 권부를 새롭게 개편했다.7월10일 全대통령은 民正黨총재직에서 물러났다.T의원의회고. 『盧후보의 鄭장관 추천을 거리낌없이 받아준 것은 全대통령이 盧후보를 발가벗고 도와주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요.
盧후보가 원하는 사람을 가급적 중용했지요.金潤煥정무1수석을 청와대비서실장에 앉힌 것도 같은 뜻입니다.』 鄭장관은 킹 메이커의 일원으로 6共에서 확실한 위상을 확보하는 듯 보였다.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5共청산의 거센 폭풍이 불자 全씨는 백담사로가고 鄭씨도「5.18光州」의 희생양이 되어 정치권에서 쫓겨나고말았다.권력은 그렇게 무상한 것이었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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