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만 있다 “뒤통수” 맞은 척/심상복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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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네바로부터 「쌀시장 개방」 뉴스가 전해진 5일 경제부처가 자리잡은 과천 제2청사는 무척 조용한 모습이었다.
경제운용의 총수인 이경식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각종 대책회의에 불려 다닌 탓인지 하루종일 자리를 비웠고,주무부처인 농림수산부는 김태수차관 이하 모든 간부들이 출근은 했으나 무슨 특별히 할 일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의무적으로 자리를 지켜야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일보다는 그저 책상에 앉아있는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쌀시장 개방이라는 충격적인 사태를 당하고도 이처럼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이미 우루과이라운드(UR)가 출범한 7년전부터 예견됐던 일이 이제서야 뒤늦게 나타났고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체념일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나라 공직자들로서는 쌀시장 개방을 입밖에 내는데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개방에 대비해 이렇게 저렇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면 심한 경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쌀개방에 관한한 토론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이같은 풍토는 정부에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닥칠 개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 관료도 거의 없었다.
박수길 전 제네바 대사가 정말 이례적으로 그런 주장을 했다가 곧장 본국으로 소환당하는 꼴을 보고는 그런 「고집」 피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가기는 한다.
또 최각규 전 부총리가 지난해말 기자회견에서 UR협상이 금방 타결되는줄 알고 쌀시장 개방 불가피론을 꺼내려다가 직전에 타결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마터면 큰일 날뻔 했구나』라며 한숨 쉬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책임있는 공직자들은 모두들 자신의 재임중에는 이 골치아픈 일이 터지지 않도록 빌었다. 심지어 최근에 사태가 터지고서도 서로 악역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공직자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에 큰 요인이 있다. 흑백논리가 판을 치던 권위주의 정권시절의 폐습이 청산되지 않은 탓이다.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제네바로 허겁지겁 달려갔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부대표단은 사실은 지난 1일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과 들로르 EC 집행위원장의 회담결과를 보고 UR협상이 99% 타결될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 막차를 타기 위해 「적기」에 떠났다고 주장하는 공직자들도 있다.
쌀개방을 막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개방후 보완대책은 모두가 사고의 탄력성을 갖고 꼼꼼히 챙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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